사랑하는 가족, 자아실현의 일터… 우리의 일상에도 성의 정치는 작동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가정 내 부부간의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분석한다. 부부는 친밀한 관계인가? 결혼 안의 섹슈얼리티는 정말 안전한가? 섹스리스 부부, 부부강간, 혼외 성관계 등이 빈번한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결혼제도 중심의 강력한 성규범이 오히려 결혼 밖에서 위험한 성을 선택하게 하는 기제가 되는 것 아닐까? 즉 한국사회의 성정치학(권력관계로서의 성)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결혼제도로부터 비롯하여 그러한 갑을관계가 조직(직장/학교)이나 더 큰 사회에서 유사하게 발현되는 것 아닐까 하는 문제의식을 따라가 본다.
“가끔 집에 늦게 퇴근해서 들어가면 집사람이 자고 있단 말이야, 애하고. 집사람이 치마를 입고 자면 이게 걷어지는 경우가 있어. 몇 차례는 속옷을 안 입고 있는 경우가 있어. 성기가 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달려든단 말이지. 근데 난 추해 보이더라고. 그래서 살짝 이불을 덮어줬어. 만약에 내가 와이프하고의 친밀감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달려들었겠지. 사고, 이성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일단 ‘아니다’ 싶으니까 손목, 살 부딪치는 것도 싫어. 그러면 아주 적나라하게 성기를 보더라도 성욕이 안 생겨.” -윤동진(남, 38세, 별정직 공무원)
“뭐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기분이었냐 하면, 그게 뭐 섹스의 요소가 아니라 내 정신이 열리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러니까 그 친구도 나도 가정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 어떤 것도 요구를 안 했어. 원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자기 자신한테도……. 근데 이제 그런, 처음에는 플라토닉 러브로 시작을 해서 나중에는 그게 사랑을 하면 육체적으로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은 따라가게 되는 것 같아.” -박주연(여, 38세, 회사원)
“서로 동질감을 회복하는 어떤 또래의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룸살롱 가면 괜히 막 오버하고, 그러면서 서로 남자들 같은 경우는 그게 약간 일탈이잖아, 그치? 도덕적인…… 그런 일탈인데, 그런 거를 같이함으로써 뭔가 이렇게 동료의식, 이런 것들을 서로 확인하는 과정, 그런 거라고 생각이 들거든. 그래서 물론 룸살롱 아가씨가 맘에 들어가지고 연애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거든.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막 옆에 있는 아가씨랑 친밀하게 놀고 뽀뽀도 하고 주물질(?)도 하고 술도 러브 샷도 하고 그러잖아……. 서로서로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여기서 친밀성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같이 갔던 사람끼리 친밀해지려고 하는 거지.” -정재훈(남, 38세, 별정직 공무원)
우리의 조직문화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 책의 2부에서는 우리의 직장을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조직들에서 섹슈얼리티의 이슈들이 어떻게 성희롱/성추행/성폭력이라는 현실로 연결되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조직의 성차별적인 제도/행위/의식이 어떻게 한국의 독특한 조직문화를 구성해내는지, 특히 회식 등 조직의 놀이문화가 이러한 메커니즘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먼저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들(S기업, L기업, H기업 등)과 대한민국 국회, 외국계 회사, 중소기업 등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터프가이 마초문화에서 공정문화까지, 우리 일터의 조직문화는 어떨까? 성차별 없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유리천장, 또는 거친 조직문화 속에서 ‘명예 남성’이 되어버린 여성의 현실,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 조직의 극단에 서 있는 국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강요하는 수많은 중소기업들…. 왜 우리의 일터는 여전히 성차별적인지, 그리고 조직이 선호하는 여성의 몸과 외모를 둘러싼 위험한 농담들과 ‘그들’만의 리그로 펼쳐지는 성적인 놀이문화의 현주소는 어떨까?
“우리 회사 유니폼은 정말 일하면서 입기에 불편한 옷이에요. 너무 타이트해요.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급이 아주 낮은 여직원이라는 걸 의미해요. 대졸 여직원은 유니폼 안 입어요. 근데 나 같은 고졸 여직원은 입어야 하죠. 그래서 갈등이 좀 있어요.” -홍미자(여, 30세, K그룹 근무)
“남자 직원들하고 일 끝나고 한잔할 때 남자 직원들은 꼭 여직원의 외모가 일종의 안줏거리예요. ‘아니, ○○○ 씨는 옷을 왜 그렇게 입어?’ ‘○○○ 씨는 외모가 꼭 어디 나가는 여자 같다니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해요. 그리고 몸매가 좋고 화장을 좀 화려하게 한 여직원이 걸어가면 남자 직원들이 아래위로 훑고…….” -곽정미(여, 24세, L그룹 근무)
“우리 부서에 여직원이 두 명 있어요. 우리가 회식에 가서 우리끼리 나란히 앉아 있으면 우리 과장님 왈, ‘왜 둘이 붙어 앉아 있어? 비워둔 자리에 앉아야지’ 합니다. 부장님, 상무님 옆자리를 딱 비워뒀어요. 그건 우리보고 거기 앉아서 술 시중하라는 거죠. 그런 상황에선 참 거절하기 힘들어요. 그냥 앉아요.” -손지혜(여, 27세, HS그룹 근무)
“그 남자 비서관이 나한테 묻기를 ‘여자들은 목욕을 어떻게 해? 내가 어젯밤 룸살롱에 갔는데, 호스티스 가슴이 우유보다 더 부드럽더라’ 그러는데,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요.” -김은영(여, 27세, 국회 하위급 비서)
슈퍼 갑의 위험한 섹슈얼리티, 관음증 공화국 대한민국의 실체
이 책의 3부에서는 성희롱/성추행과 성상납으로 얼룩진 한국사회 ‘슈퍼 갑’들의 일그러진 섹슈얼리티를 분석한다. 조직의 어떠한 성차별이 성희롱/성추행을 유발하고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어떻게 인권을 침해해가는지, 그리고 대한민국 전체가 어떻게 비틀린 관음증에 동조하면서 가해의 공범자가 되어가는지의 경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슈퍼 갑들의 성희롱/성추행 사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2년 1월 우근민 제주도지사의 성희롱 사건(한 여성직능단체장의 가슴을 만짐), 2006년 최연희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 파문(“식당 아줌마로 착각했다”), 2007년 9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마사지 걸’ 발언(“얼굴이 덜 예쁜 여자들이 서비스가 좋다”), 2010년 이강수 고창군수의 성추행 사건(계약직 여직원에게 누드 사진 촬영 요청), 2010년 7월 강용석 전 한나라당 의원의 성희롱 발언(“아나운서는 다 줄 생각을 해야 한다”), 2012년 12월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의 성희롱 발언(“요즘은 성형을 너무 많이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룸에 가면 오히려 자연산을 찾는다”), 2013년 5월 고양 덕양구청장의 여비서 성추행 사건 등등.
이러한 슈퍼 갑들의 폭력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이지 않고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2013년 3월에는 신임 법무부 차관 김학의가 성접대 의혹으로 공개수사가 시작되자 취임 일주일 만에 사표를 제출했고(그러나 2013년 11월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2013년 10월 16일에는 직속상관의 성관계 요구와 성추행으로 고통을 당하던 여군 대위가 결국 자살한 채 발견됐다. 한편 르노삼성자동차에서 10년간 일했던 한 여성이 성희롱 피해 사실을 회사 측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징계 처분을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증언을 한 동료 직원에게도 징계가 내려졌으나, 이와 반대로 가해자는 몇 주의 정직 처분만 받은 후 다른 부서로 이동해 직장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침묵하는 것일까. 장자연 사건 직후인 2009년 4월, 한국예술인노동조합은 조합원을 대상으로 인권 침해 실태조사 및 심층 면접조사를 벌였다. 대중문화연예인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실시된 이 조사에서, 성상납 피해 경험이 있는 이들이 법적 대응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응답이 53.5%, “2차 피해가 두려워서”는 응답이 10.9%였다. 그리고 응답자 중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네 명은 “법적 대응을 한 적이 있으나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으며, 75명은 “캐스팅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조사 결과 상습적으로 성상납을 강요하는 열 명의 가해자 목록이 확보되었는데, 문제는 노조 측 역시 그 블랙리스트의 인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목록을 공개했을 때 가해자를 철저히 처벌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갑-을 정치학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연예인 A씨의 불법 유출 비디오에 대해) 정말 A씨 불쌍해요. 그 비디오 장면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남자친구(매니저)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데, 남자친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결혼한 친구와 그 비디오를 같이 보았는데, 내 친구가 말하기를 ‘저 남자 정말 나쁜 남자 같아. A는 정말 저 남자 사랑해서 하라는 대로 다 하잖아. 근데 저 남자는 완전히 테크니컬한 데다 프로페셔널이야. 완전히 저 남자 A의 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것 같아. 정말 나빠.” -장부영(여, 30세, H그룹 근무)
“첫 소속사 사장은 ‘내가 널 뭘 믿고 밀어주느냐’며 자기의 애인이 되어달라고 했다. 40대 사장은 고등학생 신인 배우에게 성상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C가 거절하자 소속사는 그녀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계약 기간 2년 동안 C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C는 이후 세 곳의 소속사를 거쳤지만, 모두 그녀에게 부당한 요구를 했다. 두 번째 소속사는 유명 스타도 소속된 중견 업체였다. 그곳에선 매니저가 나서서 스폰서를 제안했다. C가 한 드라마에 캐스팅돼 미팅까지 마친 상황에서 매니저가 ‘영화사 임원 하나가 널 보고 마음에 든다면서 개인적으로 보자고 한다’고 말했다.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느냐고 따지자 매니저는 ‘그렇게 안 하면 일 못한다’고 협박했다. 결국 C는 스폰서 제안을 거절했고, 미팅까지 마친 드라마에선 그의 배역이 사라졌다.” -2009년 4월 한국예술인노동조합의 인권 침해 실태조사 및 심층 면접조사에서
“너무 억울하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기 전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한을 풀고 싶다. (……) 힘없고 백 없는 저는 권력의 힘, 저를 개처럼 부린 김학의와 윤중천의 힘으로 어디 하소연 한번 못하고 숨어 살다 세상이 떠들썩해지면서 피해자로 등장했다. (……) 어머니는 그 당시 윤중천의 협박과 무시무시한 힘자랑에 딸의 억울함을 하소연도 한번 못하고 그 추잡함을 알아버리고 저와 인연을 끊었다. (……) 범죄 앞에선 협박도 폭력도 권력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 앞에 보여달라.”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 사건의 피해 여성이 2013년 11월 청와대의 국민 신문고에 올린 탄원서 내용 중 일부
“가해자가 회사에서 정말 힘 있는 사람이라면 난 도저히 저항 못해요. 난 정말 힘없는 일개 직원이고 거기에 저항했다간 내가 하는 일에 분명히 영향을 미칠 텐데, 어떻게 저항해요. 그냥 참아야지.” -손지혜(여, 27세, HS그룹 근무)
“난 성희롱에 저항할 생각 없어요. 왜냐하면 내 일자리에 바로 위험으로 다가올 거예요. 그리고 내가 뭐라 그러는 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않아요.” -주하진(여, 27세, K그룹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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