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무남독녀로 아쉬울 것 없이 살던 철부지 공주인 나에게 중대 위기가 닥쳤으니 그것은 바로 카드 중지!
할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애걸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결혼 명령이다. 조금씩 양보해서 일단 선 먼저 보면 카드 중지를 풀어주신다는 말에 현진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간 자리에 나온 남자는 박영민, 그야말로 독불장군. 무조건 날 따르라는 식의 나폴레옹 같은 남자다. 그 사람의 이상형이 허난설헌에 신사임당이라고? 망할! 그런데 거기서 왜 홍길동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정말 그렇게 시 잘 짓고, 글 잘 쓰는 여자가 매력이 있는 건가? 뭐, 최소한 몸매랑 얼굴은 안 보는 것 같아 좋긴 하다.
아저씨는 싫어, 싫다고……. 음, 그런데 이 남자 의외로 자상한 면도 있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카드보다 더 좋아지는 걸? 앗! 게다가 다른 곳에서 태클이? 안 돼, 안 돼! 이 사람은 내 거야!
나, 박영민은 왕이 사라진 이 시대에 나만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 선을 보라고? 외모나 성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나에게 왕국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얼마나 보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일단 집안이 좋으니 합격. 가을에 약혼, 겨울에 결혼이야. 뭐, 선이 다 그런 거지. 사랑? 후후, 그런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닭살스러운 짓이지. 결혼은 말이야, M&A 같은 거라고! 난 저런 철없고 단순한 여잔 쳐다보지도 않았어. 하지만 뭐, 보면 볼수록 저 여자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걸. 사람이란 무릇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이현진, 당신이라면 내 왕국을 좀 더 천천히 세워도 될 것 같아.
“현진아, 이 심리 테스트 재미있겠다.”
“뭔데? 말해 봐.”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음…… 난 카드, 최근에 구입한 가방. 어우 야, 그렇게 노려보지 마. 그거 달랑 100개밖에 안 만들었대.”
“…….”
희정은 왜 이 심리테스트인지 뭔지를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가 곧바로 밀려왔다.
하긴 가치 기준을 알 수는 있겠다. 문젠 이렇게 대답하는데 테스트 결과가 나올까 몰라.
“좋아. 두 번째, 당신이 무인도에 가게 되었다. 딱 세 가지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는가?”
“뭐야? 달랑 세 가지? 너무해. 그것밖에 안 돼?”
“야! 내가 그런 거니? 이 질문이 그렇단 말이야.”
희정은 현진을 째려보며 말했다.
“음, 일단 썬크림. 나 햇볕에 잘 타잖아. 수영복은 필요 없으려나? 그럼 누드로? 흐흐흐, 너무 야한가? 그리고 하나는 뭘 가져갈까?”
“너 장난하니?”
희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현진을 바라보았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종종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녀를 경악시켰다.
“……내 카드.”
“카드?”
“그래 카드가 있어야 물건을 사지.”
“야! 무인도라고 했잖아. 무인도!”
“그래, 무인도. 알아들었어. 거긴 카드 안 돼?”
“…….”
희정은 잡지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차라리 말을 말자.
“왜? 그만하게? 재미있는데 계속하자. 응?”
“됐어, 손톱 손질이나 할래. 미스 박, 여기!”
희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용실 직원을 불렀다.
“뭐야, 심리테스트라면서! 끝까지 해야지 하다 말면 결과가 안 나오잖아. 야! 끝까지 해.”
“…….”
그러나 희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지지배야, 뭐 심리테스트를 할 여지가 있어야 하든지 말든지 하지!
희정이 자신을 무시한 채 손톱 손질을 시작하자 현진은 입을 삐죽댔다. 그러다 잠시 후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현진이 진지하게 희정을 불렀다.
“희정아.”
“응?”
“정말 무인도에서 말이야…….”
“응.”
“정말 카드를 사용할 수 없을까? 골든데?”
“…….”
“아니, 그게……. 에이, 요즘 카드가 안 되는 곳이 어디 있어!”
잠시 할 말은 잃은 희정은 한참 후 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응, 말해.”
희정의 말에 현진이 말했다.
“넌 보호 차원에서 어디 인적 드문 곳에 격리, 아니, 감금을 시켜야 할 것 같아.”
“감금? 왜? 나 혼자는 무서워서 싫어!”
“너희 부모님이나 도우미 아줌마야. 그렇다고 쳐도, 난 있지, 너하고 대화라는 것을 나누다 보면 종종 네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해. 아님 차라리 내가 그냥 확 접싯물에 코를 박고 싶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서 그러는 건지……. 10년 친구가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니? 넌 범죄유발형이야.”
“지지배, 너 갑자기 뭔 헛소리냐? 왜 나하고 얘기하다 말고 접싯물에 코를 박아?”
희정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왼손을 손질하고 있는 미용실 직원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이시여! 전요, 쟤 남편이 나중에 쟬 막 팼다던가, 아님 도저히 못살겠다고 이혼한다고 해도 다 이해합니다. 암, 이해하고, 말고요. 정말 웬만하면 이 결혼 막고 싶네요. 그 남자 도대체 뭘 보고 얘가 좋다고 지극 정성일까요? 누군지 - 알지만 - 앞으로 고생길이 훤합니다, 훤해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