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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화

목어화

[ 양장 ] Drama Book이동
지우란 저 | 눈과마음 | 2005년 03월 1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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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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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5년 03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358쪽 | 480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57512630
ISBN10 895751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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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분명 그 방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의 낮은 다그침에도 그녀는 처음부터 그랬듯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혹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순간 환우는 그 눈빛에서 이상하게도 뜻 모를 절망감을 보았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 절대 그럴 리 없는 말인데도 환우는 뭔지 모르게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을 그녀의 눈을 통해 본 것 같았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반면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그 뜻이 그를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지금 겁을 먹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 앞에서 그녀는 또다시 궁지에 몰린 사슴처럼 잔뜩 움츠러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환우는 그것에 더 화가 났다. 내가 자기를 해치기라도 할 듯 보이던가. 나를 그런 놈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그녀의 입장으로선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환우로서는 그녀가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아직도 풀지 않은 것에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환우는 이를 악물며 그녀의 팔목을 다시 거칠게 잡아당겼다.
“벙어리야? 말 못해? 한 번 더 내 말을 무시했다간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하지만 화가 나서 제멋대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 말을 한 순간, 환우는 후회했다.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무언가가 갈라진 듯, 깨어진 듯. 그리고 상처받은 듯……. 그녀의 눈 속에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다. 마음속에 생긴 커다란 균열. 그녀의 눈에서 그것을 본 순간 환우의 가슴에도 무언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든 순간, 결국 흔들리던 가슴에 쫙 금이 가고 말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한동안 그만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한 행동……. 그것은 수화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들이 사용하는 대화의 수단.



“내가 당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난 당신을 원해.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세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두 번의 키스, 당신은 거부하지 않았어.”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말만큼이나 직선적이었다.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관심이 아냐. 그렇다면 만나는 데 아무 문제될 거 없잖아.”
세나는 순간 히스테릭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문제될 게 없다고?
세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재빨리 글을 휘갈겨 썼다.
- 제 뜻은 이미 전해 드렸을 텐데요. 전 싫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만남이라는 거 듣기에도 육체적인 관계 외엔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네요. 그런 거라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거절합니다.
환우는 잠시 쪽지를 받아 들고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이제야 알겠다. 뜻을 전하는 그의 어휘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확실히 노골적인 것을 싫어했다. 같은 뜻이어도 갖은 미사여구로 돌려 말하는 걸 더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려는 듯 몇 번의 거절을 즐겼다. 환우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연애는 어때? 나와 연애하고 싶은 맘은 없소?”
세나는 순간 그의 말에 놀랐다.
지금 이 사람이 나에게 연애를 하자고 말하는 건가?
그녀의 혼란스런 마음을 알았는지 그가 좀 더 확실히 말했다.
“좀 전에 말했듯이 나 당신한테 관심 있어. 그리고 그건 한 번으로 끝낼 만큼 작지 않아. 나하고 연애하자. 당신과 계속 만나고 싶어.”
세나는 한순간 어떠한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또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절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녀 같은 사람과 만나길 원치 않는다. 더구나 복잡한 남녀 관계.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서 거짓이라곤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바로 그녀. 자신을 원한다고 했다. 나를 갖고 싶다고 했어. 나를 낳아준 아버지조차 이런 나를 무시하고 거부했는데, 그가 나를 원한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너 거절할 수 있겠니? 정말 그를 포기할 수 있어?



환우는 잠시 아버지의 눈을 응시하다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럼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저 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뭐야?”
지 회장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아들의 말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 회장은 노기 성성한 고함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헛소리야? ……여자냐? 설마 지금도 그곳에서 오는 게야?”
환우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다른 여자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곳에서 오는 길입니다.”
잘못한 기색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아들의 말에 지 회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두 부자 사이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매서운 시선만이 오갔다. 그런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지 회장이었다.
“당장 정리해!”
아버지의 일방적인 명령에 환우의 눈빛은 좀 전보다 더욱 차가운 냉기를 뿜었다.
“못합니다!”
“뭐야?”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도 전 이 결혼, 할 수 없습니다.”
“이, 이놈이!”
지 회장은 끓어오르는 화에 의자 팔걸이를 내리쳤다.
“이유가 뭐냐? 분명 네 놈 입으로 이 결혼을 한다고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안 하겠다는 이유가 뭐야?”
아버지의 다그침에 환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는 똑바로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여자를 잃는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아버지와 다른 점이 뭔지 아십니까? 전 제 욕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긴다는 겁니다. 전 그 여자가 갖고 싶습니다. 원치 않는 결혼 따위로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한 여자 때문에 남은 생을 후회와 고독 속에서 마감하고 싶지는 않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뭐라 하시든 전 절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순간 지 회장은 말문이 막혔다. 처음 보는 아들의 진심 어린 말에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 홀린 어리석은 놈이라고 소리쳐야 옳았지만 그는 하지 못했다. 어떻게도 잃고 싶지 않은 그 마음, 그 절실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 이상 아들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꽉 막힌 목이 숨겨두었던 설움을 돋구었다. 아들의 말대로 그의 인생은 고독과 후회, 그리고 애틋한 그리움이 전부였다. 그는 어느덧 눈앞에 떠오른 얼굴을 그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그 정도인 게냐?”
환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 너처럼 무뚝뚝한 놈도 결국은 코가 꿰이긴 하는구나.”
아버지의 싫지 않은 핀잔에 환우는 피식 웃었다.
“짚신도 짝이 있다지 않습니까. 저도 이제야 제 짝을 만난 거죠.”
“짝이라고? 하이고, 네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어떤 아인지 궁금하구나. 널 이렇게 만든 아이라면 필시 보통은 아니겠지.”
“나중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돌아왔다는 인사조차 못해서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제 뜻을 들어주셔서…….”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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