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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타협은 없다

내 인생에 타협은 없다

: IBM 신화를 만든 왓슨의 황소고집

[ 양장 ]
캐빈 매이니 저 / 김기영 감역 | 21세기북스 | 2005년 01월 2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7 리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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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1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599쪽 | 889g | 153*224*35mm
ISBN13 9788950907280
ISBN10 8950907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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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케빈 매이니(Kevin Maney)
《USA 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비즈니스 저널리즘 업계에서 ‘최고의 칼럼니스트’로 뽑혔으며, Marketing Computers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로 네 차례나 선정하기도 했다. <비즈니스위크>의 베스트셀러 Megamedia Shakeout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자 : 김기영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MBA와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경영대학원장, 연세대학교 부총장, 한국경영학회 회장, 미국 Decision Sciences Institute 부회장(평생 Fellow)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명예교수(석좌교수),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 경영대학 특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산관리』『계량의사 결정론』『생산 전략』『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재발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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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문화가 힘이다
직원들은 왓슨의 개인적인 습관과 신념에 주목하고 그것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금주 정책과 복장 문제 외에도 왓슨은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를 회사에 불어 넣었다. 1917년 1월에 열린 판매촉진대회에서 그는 건강에 대해 피력했다. 일반적인 비즈니스 연설과는 다소 동떨어진 주제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적당한 운동과 신선한 공기를 취하고, 제 시간에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며, 충분히 자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직원들에게 항상, 특히 경쟁업체를 대할 때는 더욱 더 신의와 예의를 지켜가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중략)
왓슨은 옛 직장인 NCR의 문화를 자신의 내면에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다양한 모습으로 CTR에 옮겨 심었다. 왓슨은 패터슨의 ‘100 포인트 클럽’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CTR에서는 ‘100 퍼센트 클럽’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할당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한 영업사원은 그 해에 클럽회원이 되어 일주일간의 연례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두 회사 모두 같았다. 왓슨은 이외에도 사원전용 컨트리클럽, 교육훈련을 위한 연수원, 그리고 정보기관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보 등 NCR의 여러 가지 문화적 소산을 재건했다.
이러한 IBM 기업 문화의 규율 덕분에 왓슨은 다소 과격하고 즉흥적인 경영 방식으로도 IBM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IBM의 기업 문화는 왓슨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의 결점을 상쇄했다.


암흑의 목요일, 공격만이 살길이다
대공황 사태(1929년 10월 24일)가 일어난 지 3주 정도가 지난 어느 월요일, 왓슨은 본사 회의를 소집하고 중역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들을 적은 서류를 직접 나주어 주었다. 기술력이 매출의 원동력이라는 신념에 따라 왓슨은 연구 부서에 시장성 있는 신제품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왓슨의 이러한 모습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다른 CEO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대부분의 CEO들은 경기가 어려울 때는 비용 절약을 위해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중략)
왓슨은 IBM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국내 기업 회계 부문의 5퍼센트만이 기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시장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었다. 왓슨은 또한 기업들이 지금은 IBM에서 생산하는 기계의 구매를 미루고 있긴 하지만 경기가 살아나면 잠재된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왓슨은 IBM이 폭발하는 수요를 이용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왓슨은 공장에서 계속 기계와 부품을 생산해 재고가 충분히 확보되도록 했다. 1929년과 1932년 사이에 왓슨은 IBM의 생산 능력을 33퍼센트 증가시켰다.


‘파괴’가 아닌 ‘건설’을 택하다
왓슨은 다른 사람들에겐 위험한 도박으로 보이는 또 다른 결단을 내렸다. 1932년 1월 12일 왓슨은 IBM 총 연매출의 6퍼센트에 달하는 1백만 달러를 투자해 당시만 해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업 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1933년에 완공된 이 연구소는 기업의 과학적 연구개발의 산실로 자리 잡았고 후대에는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센터와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를 비롯한 유수한 기업 연구실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연구소 건립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왓슨은 어떻게든 수요를 이끌어내야만 했다. 경제 상황이 어떻든 간에 다른 기업들이 살 수 밖에 없는 제품을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IBM이다’
IBM의 기업 문화에는 중요한 심벌이 하나 있었다. 바로 ‘THINK’라는 문구였다. IBM에서는 중역실과 회의실, 공장, 건물 출입구, 구내식당, 심지어는 회사 문서와 사무용지에서도 이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라고 훈계하는 이러한 문구가 재미있는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당시의 여러 작가들과 만화가들이 이를 인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중략)
‘THINK’가 IBM의 심벌로 자리잡아감과 동시에 왓슨은 IBM과 동의어로 인식되었고, IBM의 직원들은 그를 경쟁력과 추진력을 갖추고 성실하고 창의적이며 열정적인, 무엇보다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기업 정신과 동일시했다. 실제의 왓슨과 IBM의 상징으로서의 왓슨 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다. 해가 지남에 따라 IBM의 상징으로서의 왓슨은 실제의 왓슨보다 더 크게 성장했다.
(중략)
왓슨은 IBM의 상징이 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왓슨 스스로도 자신의 유명세를 강화해나가 도움이 될 만한 인물들과 친분을 쌓았다. 왓슨이 미국 대통령들과 친분을 쌓을 만큼 IBM의 기업 규모나 중요성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왓슨의 개인적인 매력덕분에 그런 일이 가능했고 왓슨은 이러한 친분을 이용해 더 큰 명성을 얻어 고위 인사들과의 연고도 넓혀갈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일들 덕분에 왓슨은 스스로 만들어낸 IBM의 고유한 기업 문화를 주도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인재를 경영하라
왓슨은 중역들에게 직원의 학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됨됨이라고 강조했다.
“임원이라면 자신의 부하 직원이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기본이며, 부하 직원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정말로 좋아하도록 해야 하오. 부하 직원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결국 관리자인 여러분들도 성공할 수 없소.” 왓슨은 이와 함께 ‘호봉에 따라 자동적으로 임금을 인상하지 말라’고 충고한 후 “인사 관리는 각 사안별로 처리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직원에 공평한 기회를 주시오.”라고 덧붙였다.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NCR의 존 레인지가 그에게 기회를 주기 전까진 실패만을 거듭했던 왓슨의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왓슨의 경영 철학이 대부분 그의 과거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도 놓칠 수 없는 ‘기회’
왓슨은 전시동안 회사를 경영해야 하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 그는 구속을 싫어했고, 영업과 마케팅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게 싫었다. 더욱이 그는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공장에서 무기를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회사, 영업사원 ,공장, 그리고 리더로서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다. 전쟁에 무릎 꿇기보다는 그 전쟁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계약을 이용하여 경이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고무총 하나로 IBM의 규모를 두 배, 세 배로 키울 수 있는 방법(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정부 돈으로만 사세를 확장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복잡하지만 선경지명이 있는 계획을 수립했고, 경영에서 감동적인 업적을 이루어냈다.


IBM의 전자산업은 ‘복수심’에서 비롯됐다?
왓슨은 IBM의 계산기 부품을 이용해 초고속 계산기를 만들 수 있다는 하버드 대학의 에이켄 교수에게 1939년 1만 5천 달러를 지원했다. 드디어 1943년 초 에이켄과 IBM 기술자들이 기계를 완성했다. 이 기계의 정식명칭은 ASCC/MARK 1이었으며 IBM내에서는 줄여서 ‘마크 1’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마크 1은 왓슨의 소망대로 명성을 날렸으나 IBM에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켄과 하버드 대학이 IBM과는 한 차례 상의도 없이 에이켄을 유일한 발명가로 기재한 보도자료를 앞서 배포한 것이다.
(중략)
마크 1 개발에서 뒤통수를 맞은 후 왓슨은 하버드와 세상을 향해 IBM이 에이켄의 도움 없이도 전자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다. 왓슨은 브라이스와 레이크를 만나 이들에게 에이켄이 만드는 기계는 모두 아이들 장난감으로 보이게 만들 그런 컴퓨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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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J. 왓슨, 그는 누구인가
IBM 창립자인 왓슨(Thomas John. Watson, 1874~1956)은 1874년 뉴욕 주 이스트 캠벨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1895년 금전등록기를 만드는 NCR에 입사해 36세에 로체스터 지역의 영업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 뒤 패터슨 사장의 신임을 얻어 NCR 자회사의 운영을 맡았으나 1912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NCR을 떠났다. 1914년에 CTR로 옮긴 것을 계기로 인생에서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CTR의 회사명을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으로 바꾸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파고를 넘으면서 ‘컴퓨터 왕국’의 역사를 열었다. IBM은 하버드의 에이켄 교수와 손을 잡고 만든 ‘최초의 전자두뇌인 Mark Ⅰ’컴퓨터를 시작으로 컴퓨터 산업의 화려한 행군을 시작, 왓슨 주니어를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가 될 만큼 성장을 거듭했다. 이후 1949년 IBM월드트레이드사를 발족시키는 등 세계를 무대로 한 사세확장에 나섰으며 1956년 왓슨 주니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왓슨의 세계사적 의미

왓슨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20세기 사상 가장 이상적인 회사 중 하나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IBM이라는 회사뿐만이 아니다.

왓슨은 _ 정보를 산업으로 바꾸었다
회계기나 컴퓨터는 왓슨이 없었어도 파워스나 레밍턴 랜드 같은 사람에 의해 발명되고 판매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업으로 만든 것은 바로 왓슨이다. 그는 정보 처리능력을 회사, 대학, 정부 ,군사 부문에 파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IBM에 의해 한 회사의 부서 간 혹은 산업 전체에서의 정보 공유가 가능해졌으며 정보 처리가 산업으로 일원화된 것이다.

왓슨은 _ 기업 문화의 힘을 발견했다
왓슨 이전에는 기업 문화란 것이 경영진들이 애써 키우고 손질하거나 연구하고 분석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왓슨은 강력하고 특징 있는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보강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IBM 학교를 창설하고 ‘100퍼센트 클럽’을 창단했으며, 세계박람회에 IBM의 날 같은 행사를 만드는 등 문화를 이야기하고 문화를 구체화시켰다. IBM의 핵심은 정보기계가 아니었다. 바로 IBM만의 독특한 문화에 있었던 것이다.

왓슨은 _ 최고 경영자로서 유명해진 최초의 인물이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대중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에 대한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존 D. 록펠러, J. P. 모건, 헨리 포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 때문이 아닌, 자신이 성취한 업적 때문에 유명해진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개인적 평판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왓슨은 자신의 회사가 별 볼 일 없을 때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유명해지기 위해 일했다. 그의 ‘THINK’라는 슬로건은 대중문화에 흡수되었고, IBM에서 보낸 오랜 시간동안 왓슨은 자신의 회사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왓슨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평판이 IBM의 성공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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