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160~165 나폴레옹 암살
머리카락에서 발견된 다량의 비소
세계사의 영웅 중에서도 특히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나폴레옹. 그는 코르시카섬의 하급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수많은 군사적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후에는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반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해 섬으로 유배당한 뒤 다시 황제 자리로 복귀했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에 패배했다. 최후에는 남태평양 유배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51년의 생애를 마쳤다.
이 불세출 영웅의 사망원인은 위암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음모에 의한 죽음이었을 가능성도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나폴레옹은 위암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되었다는 설이다.
1960년대에는 독극물학 전문가인 한 스웨덴 인 의사가 독자적인 가설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말년의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측근의 일기에 의하면 위염, 구역질, 현기증, 오한 등의 증상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는 증상들을 통해 나폴레옹이 만성 비소 중독에 걸렸던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죽은 다음날 자른 머리카락을 입수해 감정한 결과, 현대인 평균치의 13배를 넘는 비소가 함유되어 있었다. 또한 비소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섭취되었을 가능성도 발견했다.
이로 인해 누군가가 나폴레옹에게 조금씩 비소를 먹여 만성 비소 중독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독살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로 몬트론 장군이 지목되다
독살이 사실이라면, 대체 누가 범행을 저질렀을까. 나폴레옹의 죽음에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을까. 자연사로 위장하기 위해 조금씩 비소를 먹였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범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은 나폴레옹의 측근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측근 중에서 범인으로 유력시된 사람은, 나폴레옹의 심복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에 동행한 몬트론 장군이다.
몬트론은 원래 나폴레옹 반대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워털루 전투 후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나폴레옹을 수행하겠다고 자처했고, 함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향했다. 이 행동이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다는 지적이다. 또 몬트론은 섬에서 와인 저장고 관리자로 일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매일 제공되는 와인에 독을 주입하기가 쉬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몬트론에게는 나폴레옹을 살해할 동기가 있었다.
첫째는 질투다. 사실 몬트론의 아내 알비느는 나폴레옹과 관계를 가져 딸까지 낳았다. 몬트론은 나폴레옹이 알비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을 보고 농담처럼 그녀를 나눠 가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로 불륜에 빠져 버렸다.(...)
또 하나의 동기로 예상되는 것은 나폴레옹의 유산이다. 원래 몬트론이 농담으로 알비느를 상납하려고 한 이유는, 나폴레옹의 유산배분 시에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죽기 3주 전에 유언장을 수정했고, 몬트론에게 줄 유산을 5만 프랑에서 200만 프랑으로 대폭 늘렸다. 이는 부하들이 받은 유산 중 최고 액수다. 몬트론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자 나폴레옹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column 음모의 뒷이야기 :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사람은 가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죽은 사람은 가짜 나폴레옹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는 나폴레옹과 쏙 빼닮은 프랑소와 로보라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조
차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는 것 같다’며 가짜 나폴레옹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사망하기 대략 1년 6개월 전부터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말수가 없어지고, 주특기였인 기억력도 약해졌다. 또 저술과 구술 필기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농사일을 즐겼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그 시점에는 이미 로보와 나폴레옹이 뒤바뀌어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 후의 세계사……
나폴레옹의 부검 소견에 따르면, 위궤양으로 인해 위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한다. 초기 암도 발견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사인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암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다.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빈 회의에 참석하던 중 나폴레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은 사건이 아니다. 뉴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pp.225~229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나치 대 공산당의 세력다툼
나치(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결성되어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이 독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1933년 2월에 일어난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었다.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거액의 배상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였고,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도 점점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시 극우파 정당인 나치와 극좌파 정당인 공산당은 서로 의석수를 늘리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치는 1932년 7월 선거에서 의석의 38%를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에 열린 선거에서는 의석수를 많이 늘리지 못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이 상당히 선전했기 때문에, 다음 선거에서는 나치와 공산당이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선거를 1주일 앞둔 1933년 2월 27일 심야, 독일 국회의사당이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불이 난 본회의장 외에는 즉시 진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은 이 사건을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난폭한 도전으로 간주했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현장 근처에서 구속된 네덜란드인 공산당원 마리누스 판 데어 루페가 진범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항의였다’고 진술했고, 자신이 단독 방화범이라고 자백했다.
국회의장 괴링은 이 사건을 공산당의 음모였다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무장봉기를 미연에 막는다는 명목으로 공산당 활동가들을 일제히 검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뒤 새로운 음모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공산당이 나치의 음모에 휘말린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사실은 나치의 자작극이었다?
나치 음모설의 근거는 방화사건 후에 나치가 보인 대응에 있었다. 나치는 사건 직후 판 데어 루페를 연행했다. 히틀러 총리와 괴링 국회의장, 괴벨스 선전부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현장에 달려가,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그를 서둘러 끌고 갔다. 또한 판 데어 루페를 포함한 5명의 공산당원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사건으로부터 두 달 후, 히틀러는 민족 및 국가적 고뇌를 배제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헌법 제약을 받지 않는 입법권과 의회 승인 없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를 정부에게 주는 ‘전권위임법’이었다. 이로써 히틀러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중단하고 천적인 공산당을 국회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나치가 방화사건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음모설을 밝히는 증언이 속출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건이 나치의 음모였음을 밝히는 정보가 속출했다.
독일 공군의 아이젠베르크 장교는 사건 다음날 동료인 브루노 뢰체르 장군이 ‘괴링이 나에게 방화사건을 계획하라고 명령했다’며 진상을 털어놓았다고 고백했다. 괴링 자신도 전후에 열린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방화에 관여한 나치 관계자가 대부분 숙청되었다고 증언했다.
아울러 판 데어 루페의 형제도 ‘루페는 나치가 약을 먹여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국회까지 끌려가 붙잡혔다’며 나치의 음모였음을 주장했다.
역시 사건은 나치의 범행이었을까. 음모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 후의 세계사……
독재체제를 구축한 히틀러는 공공사업과 군수산업을 증강했다. 이로 인해 540만 명의 고용이 창출되고 600만 명에 이르던 실업자 수가 급감했다. 국민들은 나치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치는 주변국을 차례차례 합병해 갔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기고 말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