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제야 내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혜린이 어느 부랑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재수 없게 내가 연루된 것임을 경찰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결백의 근거는 빈약했다. 그것은, 나는 살인을 한 적이 없다는, 더욱이 혜린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는 믿음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었다. 그 믿음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경찰도 내 주장의 빈약한 근거를 눈치채고 있었다.---p.43
대길은 자신이 뿌리까지 비천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설령 대길이 이 전쟁 통에 살아남아 어떤 출세를 거듭하더라도 자신은 윤조와 같아질 수 없고, 윤조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불길이 옥석을 다 태워버린다면, 다 태워 재만 남게 된다면 그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그렇게 세상이 뒤집힌다면 그도 이 비천함에서 뒤집혀 완전히 다른 좌표에 처박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이조가 필요했다.---p.123
혜린이 무엇을 알아내려고 했든, 실제로 무엇을 알았든 간에 혜린의 죽음은 할아버지와 얽혀 있었다. 할아버지, 만리, 혜린, 그리고 나. 주요 인물 중 두 명의 여자가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 한 명은 나의 연인이었고, 또 다른 여자 만리는 아마 할아버지의 연인이었을 것이다.---p.141
나에게 이성으로 주체할 수 없는 일탈의 욕구가 있다면 차라리 나는 할아버지처럼 당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대를 거듭할수록 외양은 더욱 모범적이 돼가고, 욕망은 그에 비례해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 혜린이 차가운 죽음으로 누워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이 내 손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p.143
네 할아버진 환갑이었지만 청년 같았어. 정말 욕심이 많은 양반이었지. 나도 욕심이 많지만 네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 뭐든 탐을 냈고 탐나는 것은 다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양반이었어. 그런데 그게 네 할아버지의 매력이었어. 네 할아버지는 사실 J시 같은 좁은 곳에 살기에는 아까운 분이셨지. 본인도 그걸 알았어. 가끔 술을 먹으면 내가 고작 이런 데서 땅이나 사 모으려고 그 전쟁 통에서 살아 남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p.173
이 이야기의 처음은 박대길이다. 혜린은 만리를 뒤쫓았고, 만리는 박대길을 뒤쫓았다. 박대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의문이다. 그가 전쟁 통에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정말로 나의 고모할머니 이조와 달아났는지, 이조가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전혀 없다. 만약 박대길이 살아 있다면? 만리가 만났던 또 다른 남자가 박대길이라면?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계속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p.180
욕망을 전염시키고, 충족시키고, 버려진 후에조차 끝없이 갈망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정작 스스로는 당신의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얼굴.
나는 그 얼굴이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항상 매혹당했고, 그 얼굴을 평생 의지해왔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유난히 불안하고 무서움이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 그때도 내가 믿고 찾은 것은 항상 할아버지의 품속이었다.---p.190
나는 마치 신기한 부적을 보는 사람처럼 급여 서류에 적힌 혜린의 생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2월 30일생. 존재하지 않는 날짜. 결코 올 수 없는 내일. 혜린의 존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p.256
그 사진을 당신이 보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우연히 그 사진을 보게 된다면, 그 사진과 함께 내 엄마, 만리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당신한테 알려진다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서커스를 보던, 언덕 위의 큰 집에 사는 소년은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어쩌면 가망 없는 사법적 처리보다 그것이 더 통렬한 복수가 아닐까, 나는 상상했지. 성기지만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늘의 그물 같은 것을 내가 믿었는지도 모르지. 순진하게도. 어리석게도.---p.305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면, 지난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를 대신해 변명해줄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다. 내 잘못이다.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나는 내가 왔던 곳과 나를 이 세상으로 오게 만든 것에 대해 알았어야 했다. 저 먼 우주의 별들처럼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