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지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는 미덕
좀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무한경쟁의 삶 속에서 낙오된 인간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간들, 결국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절망의 끝에 선 사람들이 만들어낸 괴물인 셈이다. 결국 그 괴물은,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 괴물은, 수많은 친구들을 누르고 오직 1등이라는 깃발을 꽂아야만 살 수 있는 우리 청소년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강해져야 하고, 더욱 강해져야 하고, 더더욱 강해져야만 한다. 그 끝없는 질주 속에 나타난 괴물은 인간들 세상을 깡그리 파괴하면서 더 강해지고, 또 강해지기만 한다. 그러니 옥탑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도 없으며, 머지않아 화성을 간다고 운운하던 강대국들의 도움도 없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오직 스스로 살아남거나 좀비에 물려서 죽는 것, 둘 중 하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은 없지만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거의 배터리가 닳아져가는 시계처럼 움직이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소설의 결말에서 어떤 자그마한 희망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부턴지 우리 아이들에게는 ‘성장’이 없어졌다고 한다. 하루하루 목숨을 유지하면서 버티기에도 힘든 삶이다. 그런 청소년들의 삶을 이 소설은 교묘하게 풍자하고 있다.
흔히들 독자들은 청소년소설에서 ‘힘들어도 그 과정을 이겨내서 한 단계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기대한다. 지금 한국 작가들이 생산해내고 있는 청소년 대상의 문학작품이란 거의 다 그런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래야만 평가받고, 또한 그런 글을 원한다. 그래서 청소년 대상의 글을 쓰는 작가들을 ‘청소년 멘토’라고도 한다. 현실에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문학작품 속에서만이라도 희망을 그려서 아프고 지친 청소년들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작위적일 만큼 희망을 노래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 정선영은 마치 벙어리처럼 그 어떤 희망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아프다고 부르짖고 있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그냥 들어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온몸으로 그냥 들어줄 뿐이다. 그것은 살아가는,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청소년들의 생명력을 믿기 때문이다.
이상권 (소설가)
예기치 않은 리얼리즘이 되다
청소년 문학은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청소년이 독자이지만, 작품 속 청소년은 교육과 계몽의 객체로 대상화되기 일쑤다. 그런데 이 책 『좀 비뚤어지다』는 청소년문학의 고질적인 강박에서 이례적으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치유를 위한 상처, 화해를 위한 갈등, 사랑을 위한 증오 같은 인위적 장치들은 이 작품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여기에는 ‘어른 없는 세계’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어른이 아이의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먼발치서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이 마지막에 등장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사태를 수습하는 일도 없다. 『좀 비뚤어지다』의 세계는 어른이 아예 공백 처리된 시공간이다. 여기서 움직이는 어른이 있다면 모두 좀비다. 좀비가 아닌 어른들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어떤 형이상학과 세속적 양식들마저 사라진 파국의 상황에서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결사적으로 뛰고 싸운다. 정선영 작가는 아이들의 가쁜 숨을 형상화하듯 문장을 잘게 쪼갰다. 글의 속도감은 파죽지세, 쾌락적일 정도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오늘날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영상매체의 언어에 훌쩍 가까워졌다.
한편 2014년 4월 16일 이후, 『좀 비뚤어지다』는 예기치 않은 리얼리즘이 되고 말았다. 좀비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뜯어 먹는 세계는, 곧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본질에 대한 적나라한 은유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권일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