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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소실형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소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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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64쪽 | 366g | 128*187*17mm
ISBN13 9788952229373
ISBN10 895222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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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노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배니싱 링에서 미약한 특수 전파를 내보낸다고 들었다. 그 전파가 배니싱 링을 찬 사람을 감싸 돌면서 수형자가 주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뇌가 감지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가쓰노리는 자신이 만만히 여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배니싱 링은 ‘미약한 특수 전파’로 ‘뇌가 감지할 수 없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경우 미약한 전파가 뇌에 영향을 주지 못하지 않을까, 하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해 버렸다. 그러니까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라면 운전자가 가쓰노리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가쓰노리는 희망적으로 내다보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배니싱 링의 효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배니싱 링을 끼운 사람은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까딱하다 치일 뻔 하는 것이다.
덕분에 가쓰노리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신호등 옆에서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오는 걸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그리고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횡단보도를 함께 건넌다. 길을 건너려는 사람의 바로 왼쪽에서 같은 속도로 건너는 쪽이 안전하다는 사실도 금세 몸으로 익혔다.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데도 마치 무인도에서 혼자 생활하는 로빈슨 크루소 생존기 같다고 가쓰노리는 생각했다.
뉴스카이 호텔 앞에서 고메야마치로 빠져나간다. 그러자 벌써 가쓰노리 집 근처가 나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우지도 않았는데 반가운 마음이 든다. 눈에 익은 풍경인데도.
그러나 산책하는 노부부도,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도 가쓰노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노부부는 틀림없이 이웃에 살고 있다. 자주 본 얼굴이다. 이름도 모르지만 아침부터 만나면 인사
를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가쓰노리와 마주쳤어도 잠자코 스쳐지나갈 뿐이다.
이것이 소실형이다. 가쓰노리는 조금 쓸쓸하다고 느꼈다. ---pp.26~27


외출 중에 누군가 집에 들어왔을까?
문의 손잡이를 밀자 예상대로 아무런 막힘도 없이 열렸다.
틀림없다. 집을 비웠을 때 누군가 마음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낌새를 가쓰노리는 느꼈다.
집 안을 빙 둘러본다.
어질러진 흔적은 없다. 하지만 미묘하게 뭔가가 달라진 기분이 든다.
그 이유를 알았다. 식탁 위에 A5 크기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형기 종료 통지서’였다.
구마모토 교도소 소장의 서명이 되어 있다. 그 통지서에 따르면 아사미 가쓰노리는 11월 5일로 형기를 다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형기가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통지한다는 무미건조
하고 간결한 공문서였다.
종이는 두 장이 겹쳐져 있었다. 그 밑에 있는 종이에는 좀 더 구체적인 지시가 쓰여 있었다.
이미 가쓰노리의 목에서 배니싱 링이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갔다는 걸 전제로 그 문서는 작성되어 있다.
배니싱 링이 떨어져 나갔어도 사회 복귀 지원을 위해 반드시 구마모토 교도소 서부 관리 센터로 출두해서 담당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지시였다.
소실형을 받는 기간이 지났는데도 가쓰노리가 나타나지 않아서 거주지로 등록된 이 집에 문서를 남겨 연락을 꾀한 듯하다.
요컨대 소실형 수형 기간이 끝났는데도 배니싱 링이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경우는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그 증거로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전혀 쓰여 있지 않다.
얼떨결에 가쓰노리는 그 문서 두 장을 꽉 움켜쥐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pp.182~183


지금 들린 비명의 주인공은 진짜로 목소리를 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비명은 가쓰노리의 머릿속에만 울려 퍼졌다.
지금의 비명은 나쓰미가 질렀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나쓰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가쓰노리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왜 그녀가 비명을 질렀을까?
악몽을 꾸었을까?
뜻을 담은 말이었다, 분명…….
확실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싫어!”라든가 “도와주세요.”라는 종류의 외침이었다.
처음에는 새로 날을 잡아 신마치의 나쓰미 집을 찾아가려고 생각했다. 탈모크림을 바르고 옷차림을 가다듬고.
하지만 그 비명을 들은 지금은 이제 달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다행히 지금은 설날이다. 자동차의 통행도 적다.
뛰어가는 게 우선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쓰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는 건 그다음 일이다.
일찍이 소실형 복역 기간에 접어들고 나서 지금까지 가쓰노리가 질주했던 적이 있다면 노숙자 아라토가 습격을 당하려고 할 때 정도일까. 그밖에는 주위에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레 걸었다.
그러나 지금은 뛰어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느낀 여성을 도와주러.
나쓰미가 사는 신마치의 집을 향해. 숨이 끊어지든 다리가 뒤엉키든 아랑곳하지 않고.
---pp.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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