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장을 나온 이철환의 눈에 유독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여러 가지 안내 책자가 가지런히 꽂혀있는 곳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책자였다. 그것은 미래와 첨단을 전시하는 박람회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인물이었다. 이철환은 그것을 집어 손에 들었다.
‘여수 손양원 기념관’
이철환은 책자를 펼쳤다. 그러고 보니 박람회장으로 오던 길에 무심히 흘려 보았던 손양원 목사 기념 오페라 공연 포스터를 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책자 속 인물은 의문과 함께 호기심이 일게 했다.
--- p.21-22
집으로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다. 그것은 평양 신학교 졸업장이었다.
갈 곳을 잃은 손양원은 한동안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는 산에 올라가 엎드려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쌀을 가지고 가서 물에 불렸다가 한 주먹씩 씹어 먹으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어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과연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하나님.’
일제강점기, 매서운 총칼 앞에 많은 이들이 무기력하게 굴복해야만 했다. 어떤 이는 일제에 순응하며 변절했고, 또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을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이곳에 계셨다면 과연 어떤 길을 택하셨을까?
여러 날 동안 계속된 기도는 손양원에게 형언할 수 없는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 p.53-54
“혹시 그거 아십니까? 예부터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하더군요.”
“목사님! 그……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손 목사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너무 아파하시니까 제가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볼까 하구요.”
“네? 그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어떻게…….”
“아프지 않게 조심스럽게 하겠습니다.”
“목사님! 그러다가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리신다구요!”
“하하!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가까이 오지 말라고 뒷걸음치는 환자도 없을 것이고, 또 언제라도 여러분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손 목사는 결국 환자의 상처 속 피고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으로 빨아내었다.
--- p.76-77
“동인아, 동신아. 이 녀석들아! 이게 도대체 웬말이냐!”
손 목사는 홍수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 감추고 참았던 감정들이 일시에 분출되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그의 통곡은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소녀는 한없이 절망했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의 슬픔 또한 소녀의 고통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소녀만큼, 아니 오히려 더 비통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소녀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놓은 반면에 그는 속으로 계속해서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강한 사랑을 그는 그렇게 혼자 갈무리하고 있었다.
--- p.163
“이 아버지에게 어찌 미움이나 슬픔이 없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일단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다. 마음으로 받아들였지. 그런데 말이다, 동희야! 그것만 가지고는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가 죽는다고 오빠들이 살아돌아오겠느냐? 그를 살리고 그의 영혼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더러 한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구제한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두 오빠는 천국에 갔으나 두 오빠를 죽인 자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한데 전도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지옥으로 가는 그를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저 불쌍한 영혼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그토록 불쌍한 영혼을…….”
--- p.169
“아버지, 아버지, 죽을 나를 살려놓고 가시다니요.”
누구보다 서럽게 목놓아 우는 그는 소녀의 두 오빠의 생명을 앗아갔으나, 그가 양자로 들인 청년, 소녀의 또 다른 오빠인 안재선이었다.
그가 손 목사의 시신을 끌어안고 얼마나 슬피 우는지 산천초목도 따라 울 정도였다. 재선의 슬픔을 보며, 소녀는 그가 남긴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먼 훗날 재선은 소녀에게 말했다.
“동희야, 내가 죽어 천국에 가면 너의 두 오빠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할 거다.”
그 말을 남긴 뒤 떠난 며칠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소녀의 가슴에 큰 상처와 원망을 남긴 소녀의 아버지 그리고 두 오빠. 안재선.
어쩌면 소녀 동희는 그들이 남긴 풍경이었다.
--- p.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