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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 세가 1

완역 사기 세가 1

[ 양장 ]
사마천 저 / 김영수 | 알마 | 2014년 11월 2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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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동양문화 top100 27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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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11월 26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548쪽 | 986g | 137*203*35mm
ISBN13 9791185430386
ISBN10 118543038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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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사실 오나라는 서주와 춘추 초기까지만 해도 존재감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다. 그러나 춘추 후기 합려와 부차 대에 와서 강대국으로 떠올라 초나라와 월나라를 굴복시키고 급기야 중원 제후국들과 패권을 놓고 다툴 정도에 이른다. 사마천은 이 흥성의 과정은 물론, 월나라에 대한 방심과 무리한 중원 진출로 인해 어이없이 멸망하는 오나라 역사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상당히 긴박감 넘치게 서술한다._61

계찰이 당초 사신으로 나서면서 북쪽 서국을 지나게 되었다. 서군(서국의 군주)이 계찰의 검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하였다. 계찰이 마음으로 알았지만 사신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야 하는지라 검을 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국에 들렀지만 군주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에 보검을 풀어 서국 군주의 무덤 위 나무에 걸어 놓고는 떠났다. 시종이 “서국 군주는 이미 죽었는데 누구에게 주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계찰은 “그런 말 마라. 당초 내가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죽었다고 내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p.79

19년(기원전 496년) 여름, 오가 월을 공격하자 월왕 구천은 취리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월은 결사대로 도전하였는데, 오의 군대 앞에 세 줄로 서서는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그었다.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이 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군대는 7리를 후퇴하였다.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차가 “어찌 감히”라고 대답하였다. 3년 뒤 월에 보복하였다.--- p.87

월왕 구천이 무리를 이끌고 오에 인사를 드리고 많은 뇌물을 바치자 오왕이 기뻐하였다. 오자서만 “이는 오를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두려워하면서 “월은 뱃속의 근심거리입니다. 지금 제에서 뜻을 얻었지만 이는 자갈밭이나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반경지고〉에 보면 ‘화근은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 상이 이를 따라 흥하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오왕은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그 아들을 제의 포씨에게 부탁하고 돌아와 오왕에게 보고하였다. 오왕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내려 죽게 하였다. 죽기 앞서 오자서는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관을 짜고,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의 동쪽 문에 걸어 놓아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라고 하였다.--- p.90

권3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강태공의 건국 방략이나 관중의 실용주의 정책에 대한 사마천의 높은 평가는 공리주의 색채가 짙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사마천은 좋은 정치를 행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책략적 수단이나 계책의 운용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인의仁義나 예교禮敎를 배격한 것이다. 요컨대 덕정이 공리나 실용과 결코 다른 개념이 아니며,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하는 정치와 정책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관중의 정치경제 사상을 긍정하면서 재부財富가 사회의식, 정신적 면모, 정치적 태도를 향상시킨다고 보았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이민利民’의 정치와 정책이야말로 최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마천의 실용적?공리적 입장은 더 나아가 강씨 정권을 찬탈한 전씨 정권에 대해서도 균형된 시선을 유지하게 한다. 즉 전씨의 정책이 백성의 인심을 사는 것이었으니 긍정할 만하다는 것이다.--- p.139

서백이 사냥을 나서기에 앞서 점을 쳤더니 “얻을 것은 용도 이무기도,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패왕을 보좌할 신하를 얻을 것이다”라는 괘가 나왔다. 이리하여 서백이 사냥에 나섰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수 북쪽에서 여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몹시 기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선군이신 태공 때부터 ‘성인께서 주에 오시면 주가 흥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를 ‘태공망’이라 부르며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 스승으로 모셨다.--- p.145

무왕은 상을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으며, 사상보를 제의 영구에 봉하였다. 동쪽 봉국으로 가던 중 길에서 묵느라 행차가 더뎠다. 여관 주인이 “제가 듣기에 시간이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하였는데, 손님은 아주 편히 자는 것을 보니 봉국으로 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소이다”라고 하였다. 태공이 이 말을 듣고는 밤중에 옷을 입고 나서니 날이 밝을 무렵 봉국에 이르렀다.--- p.149
노 환공이 부인과 함께 제에 왔다. 제 양공은 예전에 노 부인과 사통한 적이 있었다. 노 부인은 양공의 배다른 여동생으로 희공 때에 시집가서 노 환공과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환공이 제에 오자 양공이 다시 사통한 것이다. 노 환공이 이를 알고 부인에게 성을 냈고 부인은 제 양공에게 이를 일렀다. 제 양공이 노의 국군과 술을 마시다 그를 취하게 한 다음, 역사 팽생으로 하여금 노의 국군을 안아 수레에 태운 뒤 늑골을 부러뜨려 죽이도록 하였다. 환공이 수레에서 내려졌을 때 이미 죽은 뒤였다. 노 사람들이 비난하자 제 양공은 팽생을 죽여 노에 사과하였다.--- p.154

41년(기원전 645년), 진 목공이 진晉 혜공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돌려보냈다. 이해에 관중과 습붕이 모두 죽었다. 관중의 병이 깊어지자 환공이 “신하들 중 누가 재상이 될 만하오”라고 물었다. 관중은 “신하 알기로는 군주만 한 사람이 없지요”라고 답하였다. 환공이 “역아는 어떻소”라고 하자 “자식을 죽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환공이 “개방은 어떻소”라고 묻자 “부모를 멀리하고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환공이 “수도는 어떻소”라고 하자 “궁형을 자청하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세 사람을 기용하니 세 사람이 권력을 오로지하였다.--- p.164?165

당초 의공이 공자였을 때 병융의 아버지와 사냥을 갔다가 사냥물을 다투다 이기지 못한 일이 있었다. 국군으로 즉위하자 그의 발을 자르고 병융은 노복으로 삼았다. 용직의 처가 아름다웠는데, 의공이 그녀를 궁으로 들이고 용직은 마차의 호위병으로 삼았다. 5월, 의공이 신지에 놀러갔을 때 두 사람이 목욕을 하면서 장난을 쳤다. 용직이 “발 잘린 사람의 자식!”이라고 하자, 병융은 “마누라 빼앗긴 놈!”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이 말에 부끄러워하며 의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함께 모의하여 의공과 대나무 숲으로 놀러가서는 두 사람이 마차 위에서 의공을 죽이고 대나무 숲에 버려 놓고 도망쳤다.--- p.169

권3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주공은 주례周禮로 대변되는 예악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아들 백금은 봉지인 노나라에서 전형적인 서주 문화와 예악을 보급, 시행해 노나라 정치 전반을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노나라는 춘추시대 이후 점점 쇠락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나라 예제와 문화를 계승한 관계로, 나라와 통치자의 맥이 전국시대 후기에 통일이 임박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p.227?228

주공이 백금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로서 천하에 낮은 신분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목욕하다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고, 한 번 밥을 먹다 세 번 뱉어내면서 일어나 인재를 맞이하면서도,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잃을까 걱정하였다. 네가 노로 가거든 나라를 가졌다고 사람들을 교만하게 대하지 않도록 하라.”--- p.238?239

주공이 죽고, 아들 백금은 앞서 봉지를 받았으니 이가 노공이다. 노공 백금이 노에 봉해지고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주공에게 국정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주공이 “어째서 늦었느냐”라고 묻자, 백금은 “그 풍속과 예의를 바꾸고, 3년상을 치르느라 늦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태공도 제에 봉해졌는데 다섯 달 만에 주공에게 국정을 보고하였다. 주공이 “어째서 이렇게 일찍 왔습니까”라고 물으니, “저는 군신간의 예를 간소화하고 그 풍속에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백금의 늦은 국정 보고를 듣고는 바로 “어허, 나중에는 노가 제를 섬기게 될 것이다! 무릇 정치란 간소하고 쉽지 않으면 백성이 가까이하기 힘들다. 쉽고 백성에 가까우면 백성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라고 탄식하였다.--- p.243

노가 공자 규를 제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환공보다 늦었다. 환공이 병사를 일으켜 노를 공격하자 노는 급하게 공자 규를 죽였다. 소홀은 자살하였다. 제가 노에 관중을 산 채로 보내라 통고하니, 노 사람 시백은 “제나라가 관중을 얻으려는 것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기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를 기용하게 되면 노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죽여서 시체로 보내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장공은 듣지 않고 관중을 (죄수를 싣는 수레에) 가두어 제로 보냈다. 제는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p.249

계문자가 죽었다. 집에는 비단옷을 입는 아내가 없고, 마구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고, 창고에는 금과 구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세 국군을 보좌했던 것이다. 군자가 “계문자는 청렴하고 충성스럽도다”라고 하였다.--- p.255

권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본 편에서 사마천은 전체적으로 덕치를 강조하는 기조를 취한다. 전문은 주로 두 가지 큰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데 하나는 건국 시조 소공의 치적이고, 다른 하나는 연왕 쾌에 의한 국정 문란과 이를 바로잡은 소왕 시기의 중흥이다. 이 사건들의 중심에 최종적으로 ‘덕치(덕정)’ 사상이 가로놓여 있다. 덕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마천은 소공과 팥배나무의 고사를 맨 앞에 배치하는 한편, 마지막 논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이 점을 상기시킨다. 안팎으로 매우 힘든 조건 속에서도 연나라가 800년 넘게 나라를 유지한 비결을 소공의 덕정에 돌리려 한 것이다. 덕정의 위력은 소왕 대의 중흥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사마천은 소왕이 유능한 인재를 우대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비신후폐卑身厚幣, 개원천리豈遠千里, 선종외시先從?始, 사쟁추연士爭趨燕 등 생생하고 설득력 넘치는 성어들을 쏟아낸다.--- p.301
소공이 섬 서쪽을 다스려 백성들의 환심을 많이 얻었다. 소공이 향읍을 순행할 때면 팥배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판결하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맞는 일을 맡겨 자리와 일을 잃는 사람이 없었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소공의 정치를 생각하고, 팥배나무를 그리워했으며, (그 나무를) 베지 않고 〈감당〉이란 시를 지어 그를 노래하였다.--- p.307?308

연 소왕은 연이 다 무너진 후 즉위하여 몸을 낮추고 후한 대우로 현자를 초빙하였다. 곽외에게 “제가 우리의 난국을 틈타 연을 기습하여 무너뜨렸소. 내가 우리 연 땅은 작고 힘은 약해 되갚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정말 유능한 인재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바람이오. 선생께서 보기에 이런 인재가 있다면 이 몸이 친히 그를 모시리다”라고 하였다. 곽외가 “왕께서 꼭 그런 인재를 모시려 한다면 먼저 이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물며 이 곽외보다 나은 인재들이 어찌 천 리를 멀다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해 궁을 짓고 스승으로 그를 모셨다.--- p.314?315

연은 진이 머지않아 6국을 멸하고 진의 군대가 역수까지 밀어닥쳐 화가 연에 미칠 것임을 알게 되었다. 태자 단은 몰래 장사 스무 명을 기르고, 형가를 보내 독항의 지도를 (진에) 바치도록 하면서 기습적으로 진왕을 찌르게 하였다. 진왕이 이를 알아채고 형가를 죽이고 장군 왕전을 보내 연을 공격하였다.--- p.319

기원전 320년 연왕 쾌가 즉위할 무렵 조정에서는 재상 자지가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쾌와 자지 간에 민망한 상황이 벌어진다. 유세가 소대의 방문이 그 시작이었다. 자지와 관계가 깊었던 소대는 기원전 318년 연왕 쾌를 알현한 자리에서 제나라에 대한 소견을 아뢴다. 즉 제나라의 경우 그 왕이 신하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패주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세였다. 쾌는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신하 자지를 더욱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녹모수가 요?순의 선양 고사로 쾌를 부추기자 국사를 자지에게 넘긴다고 공표하기에 이른다. 이어 어떤 사람이 우와 백익의 선양 고사를 예로 들며 실권이 태자에게 있다고 이간질했는데, 쾌는 거기에 넘어가 300석 이상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자지에게 넘기고 만다. 급기야 자지가 남쪽을 바라보며 왕권을 행사하고 쾌는 신하로 자청하는 지경까지 갔다. 자지가 권력을 행사한 3년 사이 연나라 국정은 난맥에 빠졌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p.331

권35 관채세가管蔡世家
두 나라는 춘추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미 3등 소국으로 전락해 국제적 지위가 아주 미약했고, 따라서 대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금만 잘못해도 침략당하기 일쑤였던 가련한 나라들이었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통치자들은 자강自强을 위해 분발하기는커녕 오히려 내분과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다. 약소국이 약한 것은 그 나름의 객관적 요소 때문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덕정과 자강에 힘쓰지 않은 주관적 요소 탓도 크다. 사마천은 본 편에서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에 관한 기록을 집중적으로 남겨 주관적 요소 쪽을 강조한다.--- p.351

제 환공과 채희가 뱃놀이를 하였는데 부인이 배를 흔들었다. 환공이 그만두라고 하였지만 그만두지 않자 환공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채 목후는 성이 나서 여동생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냈다. 제 환공이 노하여 채를 정벌하였다. 채는 무너지고 목후는 포로로 잡혔다.--- p.360

소후 10년(기원전 509년), 초 소왕에게 조회드리러 가는 길에 멋진 가죽옷 두 벌을 가지고 가서는 한 벌은 소왕에게 바치고 나머지 한 벌은 자기가 입었다. 초의 재상 자상이 그걸 갖고 싶어 하였으나 주지 않았다. 자상이 소후에 관해 험담을 하자 (소왕은 소후를) 초에 3년 동안 억류하였다. 소후가 진상을 알고는 바로 가죽옷을 자상에게 바쳤다. 자상은 그 옷을 받고 바로 소후를 돌려보내도록 말하였다.--- p.363

초 소왕이 채를 토벌하려 하자 채는 겁이 나 오에 급히 알렸다. 오는 채가 너무 멀기 때문에 (구원하기 어렵다며) 도와주기 쉽게 도읍을 자기들과 가까운 곳으로 옮길 것을 약조하라고 하였다. 소후는 개인적으로 허락하고 대부들과는 논의하지 않았다. 오가 채를 구원하러 오자 그 참에 주래로 도읍을 옮겼다. 28년(기원전 491년), 소후가 오에 조회를 드리러 가려 하자 대부들은 다시 도읍을 옮길까 겁이 나서 리라는 도적에게 소후를 죽이게 하였다. 그런 다음 도적 리를 죽여 사건을 무마시키고 소후의 아들 삭을 세우니 이가 성후이다.--- p.364

권36 진기세가陳杞世家
사마천은 기나라는 너무 작고 미미해서 그 사적을 기술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기나라를 위해 세가를 마련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기나라가 우 임금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우 임금의 공적이 그만큼 크고 후대에 미친 영향이 깊어 사마천은 그 후예의 이야기를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p.396

영공이 그 대부 공녕, 의행보와 함께 하희와 간통하고는 그녀의 속옷을 입고 조정에서 희롱을 일삼았다. 설야가 “국군과 신하가 음란한 짓을 하면 백성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라고 바른말을 하였다. 영공이 두 사람에게 이 말을 알리자 두 사람은 설야를 죽일 테니 공은 말리지 말라며 기어코 설야를 죽였다. 15년(기원전 599년), 영공이 두 사람과 하씨 집에서 술을 마시다 두 사람에게 “징서가 그대들을 닮았구려”라고 농담을 하자 두 사람은 “공을 닮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대꾸하였다. 징서가 분노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고 영공이 나오자 마구간 문에 쇠뇌를 숨겨 놓고 기다리던 징서가 활을 쏘아 영공을 죽였다. 공녕과 의행보는 초로 달아났고, 영공의 태자 오는 진晉으로 도망쳤다. 징서가 진陳나라의 제후로 스스로 섰다.--- p.407

장왕과 장왕의 태자 역시 하희의 미모에 반해 하희를 취하려 했다. 신공 무신이 설득해 이를 단념시키고 영윤 양노에게 시집을 보내게 했다. 그후 양노가 전투에서 전사하자 하희는 양노의 아들과 불륜을 저질렀다. 이에 무신은 화근 덩어리인 하희를 친정인 정나라로 돌려보내라고 건의했다. 얼마 후 초나라는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전후 회담의 사신으로 무신을 보냈다. 그런데 무신은 제나라로 가지 않고 정나라로 가서는 하희를 데리고 진晉나라로 망명했다. 무신은 15년 넘게 하희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가 이 기회에 그녀를 차지한 것이다. 화가 난 초 장왕은 무신의 가족을 몰살해버렸고, 무신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오나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군사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견제하게 했다. 오월쟁패라는 춘추 후기의 국제적 패권 쟁탈전에서 초나라가 빠지지 않았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하희 추문에 있었던 셈이다.--- p.422?423

권37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춘추시대 전체의 역사를 살펴볼 때 위衛나라는 비교적 오랫동안 제나라와 송나라 등과 가깝게 지냈고, 진晉나라에 의존해 초나라의 북진에 맞서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위나라는 초나라의 중원 북상과 쟁패를 저지하는 제2 방어선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초나라가 중원으로 깊이 들어와 동서를 분할한다면, 진과 제?노의 전략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런 사태를 막는 것에 위나라의 전략적 중요성이 있었다. 이 같은 위나라의 형세를 염두에 두고 본 편을 읽으면 위나라의 내정과 외정을 좀더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p.441

주우가 커서 군대 일을 좋아하자 장공이 그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였다. 석작이 장공에게 “서자께서 군대 일을 좋아한다 하여 군대를 이끌게 하면 그로부터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바른말을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16년(기원전 719년), 주우가 위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모아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주우 자신이 위의 국군이 되었다.--- p.449?451

우공자가 태자를 위해 제나라 여자를 아내로 취하게 하였는데, 혼례를 치르기 전에 선공이 태자비가 될 여자의 아름다운 미모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자신이 취하고 태자는 다른 여자를 취하게 하였다. 선공이 취한 제나라 여자에게서 아들 수와 삭이 태어나자 좌공자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였다. 태자 급의 어머니가 죽자 선공의 정부인은 삭과 함께 태자 급을 나쁘다며 헐뜯었다. 선공이 태자의 아내 될 여자를 빼앗은 뒤로 태자를 미워하며 폐위시키려 하였다. 태자에 대한 나쁜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태자 급을 제나라로 보내면서 강도를 시켜 국경에서 죽이게 하였다. 태자에게 흰 깃대 장식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는데, 강도에게 국경에서 이 흰 깃대 장식을 가지고 있는 자가 보이면 죽이라고 일렀다. 떠나려 할 때 태자의 배다른 동생이자 삭의 형인 수가, 삭이 태자를 미워하고 국군이 태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태자에게 일렀다. “강도가 국경에서 태자의 흰 깃대를 보면 바로 태자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가서는 안 됩니다.” 태자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하고는 마침내 떠났다. 태자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수는 흰 깃대를 훔쳐 먼저 국경으로 달려갔다. 국경에서 기다리던 강도는 그 표지를 보고 바로 죽였다. 수는 이미 죽었는데 태자 급이 도착해서는 강도에게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강도가 태자 급마저 죽이고 선공에게 보고하였다. 선공은 바로 아들 삭을 태자로 삼았다.--- p.451?452

의공이 즉위하여 학을 좋아하는 등 사치를 일삼고 음탕함을 즐겼다. 9년(기원전 660년), 적이 위를 침공하자 의공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군사 중 일부가 반기를 들었다. 대신들은 말하였다. “국군께서는 학을 좋아하시니 학더러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시지요.”--- p.453

심부름꾼 하나가 나오는 틈에 자로가 안으로 들어가서는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하필 공회를 이용하려 하십니까? 그를 죽인다 해도 다른 사람이 그를 이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자로가 이어 “태자께서는 용기가 없다. 누대에다 불을 지르면 분명 공회를 놓아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듣고는 겁이 나 석기와 우염을 보내 자로에게 맞서게 하였다. 창으로 자로를 공격하여 갓끈을 잘랐다. 자로는 “군자는 죽을지언정 관은 벗지 않는다”라며 갓끈을 다시 매고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공자가 위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허! 시(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유(자로)는 죽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p.461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송미자세가〉는 은나라 말기의 세 현자, 흔히 ‘삼인三仁’으로 불리는 미자, 기자, 비간의 사적이 합전에 가까운 형식으로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들 삼인의 행적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의 폭정을 부각시키는 도입부가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이런 사마천의 의도는 분량 면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삼인의 사적이 전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것이다.--- p.489

왕자 비간 역시 주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간언해도 주왕이 듣지 않자 그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는 “군주에게 허물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지지 않는다면 무고한 백성들만 피해를 입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왕에게 바른말로 충고하였다. 주왕이 노해서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던데 정말 그러한가”라며 왕자 비간을 죽여 그 가슴을 열고 심장을 보았다.--- p.500

미자는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은 세 번을 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자식은 계속 통곡할 따름이다. 신하가 세 번을 충고하였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사와 소사가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마침내 떠났다.--- p.500

대사마 공보가의 아내가 예뻤는데, 외출하였다가 길에서 태재 화독을 만났다. 화독이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독이 공보가의 아내가 탐이 나서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선전하길 “상공이 즉위한 지 10년 만에 열한 차례나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없다. 모두 공보가가 한 짓이니 내가 공보가를 죽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 10년(기원전 711년), 화독이 공보가를 공격하여 죽이고 아내를 빼앗았다. 상공이 노하자 상공마저 시해하고 정에서 목공의 아들인 풍을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장공이다.--- p.509

10년(기원전 682년) 여름, 송이 노를 공격하여 승구에서 전투를 치렀다. 노가 송의 남궁만을 산 채로 잡았다. 송이 남궁만을 (풀어줄 것을) 요청해서 남궁만은 송으로 돌아왔다. 11년(기원전 681년) 가을, 민공과 남궁만이 사냥을 나가 바둑을 두다가 다툼이 일어났다. 민공이 노하여 남궁만에게 “당초 내가 그대를 존경하였지만, 지금 그대는 노나라의 포로일 뿐일세”라며 모욕을 주었다. 힘이 세었던 남궁만은 이 말에 원한을 품고는 몽택에서 바둑판으로 민공을 쳐 죽였다.
--- p.510

양공은 초 성왕과 홍수에서 싸웠다. 초의 군대가 강을 다 건너지 않았는데 목이가 “상대는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은 듣지 않았다. 강을 건넜으나 전열을 미처 갖추지 못하고 있자 목이가 “지금이라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은 “저들이 전열을 갖추기를 기다려라”라고 하였다. 전열을 다 갖춘 다음 송이 공격하였으나 송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양공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공을 원망하였다. 양공은 “군자는 남이 곤경에 처하였을 때 공격하지 않으며, 전열을 갖추지 않았는데 북을 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자어가 “군대는 승리가 우선이거늘 무슨 그런 어리석은 말씀을 하십니까? 공의 말대로라면 노비처럼 남을 섬기는 것이 낫지 전쟁은 무엇하러 합니까”라고 하였다.
--- p.51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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