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읽히는 책이라면 고전’이라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가 읽고, 아버지가 읽고 또 손자가 읽는 책. 그러기에 책을 쓰는 작가나 저자라면 누구나 이런 책을 쓰고자 할 터이다. 근대의 천재라는 육당 최남선도 세상을 마치며 역사에 남을 책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슬퍼했다고 하는데, 무애 양주동은 육당이 후대 500년 동안 남을 책으로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과 무애 자신의 [고가연구]를 꼽았다는 일화를 자랑으로 전했다. 우리의 고전을 말하자면 가깝게는 [춘향전]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만해萬海의 [님의 침묵] 같은 책을 꼽을 수도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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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기파랑을 찬미하는 앞의 넉 줄 여덟 구句의 뜻이고, 마지막 한 줄 두 구에서는 서리도 침범할 수 없는 잣나무의 높은 기상으로 정서正敍해 찬미를 강화했다. 화반花判은 화랑의 상징이다. 이렇게 이 시는 시인의 물음, 달의 대답, 감탄의 결사結辭라는 세 단락으로 되어 있고, 특히 시의 벽두에 ‘냅다 던지듯이 멋들어진 허두虛頭’인 ‘열치매’(무애의 표현)는 그 발상에서 동서고금의 다른 시가 따를 수 없는 이 시만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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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은 괴이한 힘이나 귀신 이야기를 이르는데, 일연은 중국의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우리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기적으로 탄생했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다고 할 것인가를 되물었다.
일연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 편을 싣는 까닭이고, 신이神異를 여러 편의 앞에 싣는 뜻임을 뚜렷이 했다. 이 말은 일연이 이 역사책을 쓰는 뜻과 사관을 밝히는 중요한 대목이어서 다시 곱씹어 논의할 만하다.
--- p.51
그러므로 시골에 살려는 사람은 인심의 좋고 나쁨을 따질 것 없이 같은 당색黨色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가면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문학을 연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을 택하는 것만 못하니, 문을 닫고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며 홀로 잘 수양한다면 비록 농민이든 공장이든 장사치이든,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인심’에서
‘인심’이 아니라 ‘도심道心’을 말하고, 혹은 실심實心을 말해온 사대부들이 퇴폐해,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이라면 인심을 논할 것도 없다는 역설. 사대부라면 오늘날의 사회 지도층이 아닌가? 인심은커녕 민심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가거지라는 결론.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수경 스님 소식이 잠시 요즘 인심을 상징하는 듯 허허하다.
--- p.128
이런 원리라면 역사에도 중심은 없다. [춘추春秋]가 중국의 역사이듯 각 민족에게는 각 민족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 [의산문답]의 이른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이다. 이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중심주의를 타파했다. 중세 보편주의를 벗어나 자기 역사를 중심에 놓는 이런 역사의 깨달음은 18세기 조선 실학에서 비로소 나타난 역사의 자각이었다. 이것은 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 곧 사람과 사물의 성질은 같은가 다른가를 다투어온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논쟁의 1세기에 걸친 축적이며, 조선 철학이 이른 큰 도달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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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남의 우도만은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으며, 갓 시집온 새색시까지도 흰 저고리와 치마를 입는다고 했다. 이것은 흰옷을 존중하는 영남 풍속을 평가하는 뜻을 담았다고 할 터이고, 또한 이것은 그의 이종사촌 유득공(1748~1807)의 동인이었던 이덕무(1741~1793)가 ?사소절士小節?에서 동시대의 영남 풍속에 대해 “여자들의 저고리는 너무 짧고 치마는 너무 길고 넓어 요사스럽다”고 한 것과 대조된다. 이 시대에는 기생의 짧은 저고리 길이가 12센티미터까지 짧아졌다는데, 200년이 흐른 지금은 젊은 여자의 치마 길이가 이에 육박하니, 지방문학의 역사는 사회사이며 풍속사이기도 하리라.
--- p.150
이 시대에는 담헌 홍대용이 북경의 유리창에서 중원의 선비들과 남자의 눈물을 논한 바 있고, 연암 박지원은 연행 중에 ?호곡장好哭場?을 말했으며 또 “영웅과 미인은 눈물이 많다”고 해 화제를 뿌린 바 있었다. 이런 뒷시대에 나온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는 우리 문학이 낳은 감성적 사랑 문학의 한 기념비라 할 터이다.
--- p.159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게 깊고, 독자는 시인을 슬퍼하고 스스로를 슬퍼할 시간. 그러나 이러한 [님의 침묵] 속에서, 설악산의 그림자는 점차 엷어지더라도 새벽종은 정녕 울리게 될 것이다.
--- p.182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시인 무애 양주동(1903~1977)은 청년 시절의 암울한 민족 정서를 홀로 걷는 산길로 노래했다. 시인으로 약관에 벌써 이름난 영문학자였으나, 일찍이 천년의 옛 노래, 사뇌가[鄕歌] 해독에 발심發心해 우리 고전연구의 길을 연 국학의 큰 스승이었다. 일본에 유학해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다섯의 나이로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수가 된 무애는, 조선 사람 최초로 본격적인 향가 연구를 통해 국학을 진흥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무애는 천재 시인이자 종횡무진한 평설評說로 일세를 휩쓴 평론가인 동시에, ?산길?, ?조선의 맥박? 등 시편을 통해 민족 정서를 고뇌한 지성이었다.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