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때문에 차마 아내들이 볼 수 없게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책을 디자인할 때부터 내가 배려한 것이 있었다. 표지를 벗겨내면 검은 바탕에 녹색 글씨로 아주 폼 나게 ‘Cultural Psychology of Masculinity’라고만 써 놓았다. 표지를 벗겨내고 들고 다니면 누가 봐도 폼나는 학술서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개정판에는 더 이상 그런 ‘꼼수’는 필요 없을 듯하다. 이제 누구나 아주 가끔은(!) 아내와의 결혼(혹은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이 던지는 ‘결혼에 대한 후회’는 그저 상징적 질문일 뿐이다. 본질은 자신의 주체적 삶에 대한 성찰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주체적 결정과 후회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 필요한 주체적 삶에 대한 성찰은 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따라서 이 책이 던지는 문제제기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정판을 펴내며」중에서
최근 부쩍 쓸쓸해진 나는 커피를 갈아 먹기 시작했다. 갓 볶은 싱싱한 원두를 사와 내 손으로 직접 갈아 먹는다. 아들을 협박해서 생일선물로 받은 커피 핸드밀의 손잡이를 돌리면, 원두가 갈리는 느낌이 참으로 상큼하다. 톱밥 정도의 굵기로 갈린 커피가루를 여과종이에 넣어 동으로 된 여과기를 얹는다. 그리고 다시 동으로 된 드리퍼 주전자로 병아리 오줌 누듯 물을 흘려보낸다. ‘커피향이 참 좋다’는 표현은 이럴 때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커피를 끓일 수 있는 아침은 정말 행복하다.
잊지 말자. 나이가 들수록, 이런 종류의 사소하지만 즐거운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준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내 삶이 즐거워지지 않는다. 국회 여야의 비율이 달라진다고 우리 부부의 체위가 바꾸지 않는다. 정치인을 아무리 욕해도 내 지루한 일상이 바뀌지 않는다. 내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즐거운 느낌이 반복되는 나만의 리추얼이다.
---「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가 아침밥을 해주지 않는다」중에서
남자들은 “그때, 내가 좀 더 용기 내서 접근했어야 했는데…”와 같은 후회를 하는 반면, 여자들은 “그때, 내가 그렇게 쉽게 응하는 게 아니었는데…”와 같은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성관계에 관해서도 그렇다. 남자들은 “그때, 그 여자와 바로 관계를 가질 걸…” 하는 후회를 주로 하는 반면, 여자들은 “그 남자와 좀 더 나중에 관계를 가질 걸…” 하는 후회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그때 그 남자와 관계를 가졌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여자들의 후회는 그래서 짧다.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보다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를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스트레스 상황에 훨씬 더 잘 적응
하고, 남자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차피 해야 할 후회라면 짧게 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말까를 망설인다면 일단은 저지르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아무 이야기나 속 터놓고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을 나눌 친구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의무감으로, 하나도 재미없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사람들을 자꾸 만나야만 한다. 하는 이야기야 정말 뻔하다. 주가 떨어진 이야기, 땅값 오른 이야기, 누구누구가 떼돈 번 이야기, 아니면 정치인 욕하는 이야기. 특히 정치인 욕하기는 전 국민의 여가활동이 된 듯하다. 물론 가끔 농담도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야 돌고 돌아,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유머다. 썰렁하기 짝이 없는 이런 종류의 유머를 ‘아저씨 유머’라고 한다. 캐디 언니들도 억지로 웃어줄 따름이다.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봄에는 발정하는 수컷처럼 설레야 옳다」중에서
우리 가족은 뒷산의 약수터를 다니며 서로를 흉내 낸다. 마치 내가 내 아버지를 흉내 내듯, 내 아들들도 나중에 자신의 자식들 앞에서 내 흉내를 낼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그 아들의 아들은 또 그 아들을 닮고…. 이 세상의 모든 가족은 이렇게 서로의 기쁨, 슬픔을 공유하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족을 떠나 먼 곳에 있으면 그토록 가족이 그리운 것이다. 가슴 저리도록….
---「우리 집 뒷산에는 ‘형제 약수터’가 있다」중에서
내 존재는 내가 좋아하는 일, 재미있어 하는 일로 확인되어야 한 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내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내 존재를 찾아 헤맬 일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어떤 일이 되었든 상관없다. 새소리 듣는 일이든, 개미새끼 보는 일이든 상관없다. 나훈아의 노래가 되었든, 슈베르트의 가곡이 되었든 상관없다. 내가 헤맬 때, ‘나’와 ‘내가 아 닌 것’이 구분되지 않아 헷갈릴 때, 내 면역시스템을 가동시켜 내 안 의 항상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 되어도 상관없다. 남 들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야 한 다. 그것이 바로 내 존재를 확인하는 비결이다.
---「도대체 댁은 누…구…세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