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의 바다에서 작은 생명체가 꿈틀거린다. 빛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물감이 바다 위에 풀려 있는 듯하다. 생명체의 시각 기관이 태양을 찾아 헤매고, 결국 그 생명체는 빛이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보이지 않지만, 볼 것 같은 예감은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빛을 향해 가는 것은 모든 생물의 본능이며, 보려고 하는 마음은 포기할 수 없는 의지인 것을.
나는 바닷가에 서서 눈에 대해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본다'라는 기적의 과정을 시작한 단세포 생물에 대해 생각한다. 나 역시 보고 싶다. 넘실대는 파도며 모래 사장, 조가비, 해초, 해변으로 밀려드는 쓰레기까지도. 내 눈 역시 똑같은 충동, 똑같이 보려는 의지로 활기를 띤다. 하지만 내 눈은 작동되지 않는다. 적어도 완전히 작동되지는 않는다. 질병으로 인해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커튼을 드리웠달까 안개가 끼였달까……. 뿌연것 너머로 주위 풍경이 떠오른다. 허리를 굽혀 모래사장을 내려다봐도 돌인지 조가비인지, 동전인지 유리조각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버려진 신문을 줍는다 해도 읽지 못할 것이다. 평생 필자이자 편집자로 살면서 '읽는다는' 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자연스런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내 존재는 인쇄된 글자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한데 이제는 아니다.
눈이 흐려지기 전까지, 나는 말 그대로 눈을 의식하지 못했다. 가끔 안경을 새로 맞추거나, 다른 사람이 내 눈에서 티끌을 빼줄 때를 제외하면 눈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줄곧 눈을 의식하며 생활한다. 머릿속에 지구본 두 개가 들어 있는 상상을 한다. 지구본 위에 섬세한 혈관이 지나가는 그림을 떠올리려 애쓴다. 깨질 듯 약하면서도 강한 눈의 위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낭만적인 싯귀뿐만 아니라 의학에서도, 심장은 생명의 중심에 있다. 심장이 멈추면 생명도 멎는다. 시력을 잃는다고 해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눈에 인간의 진수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떤 것을 좋아할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 받을지를 봄으로써 결정한다.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지낸 몇 년 동안, 나는 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시력이 슬금슬금 저하되기 전까지는 보는 걸 당연시했지만, 요 몇 해 사이에는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대단한 선물임을 배우게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계 속에서 살면서 신체의 부자유를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히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단순히 시력을 잃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통찰력을 얻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 본문 중에서
시력 때문에 인감힘 쓰다보니 시간이 없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맛보게 된다.영광이 시디는 아테네 앞으로 몸이 떠느느 그리스인들과 동족의식이 느켜지기도 하고, 지혜를 얻는 대신 눈을 내준 오딘과 도 동감하게 도니다......(중략) 나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반만보는 것이,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징인 듯싶다고..
--- p.159 마지막 부분
나는 맹인은 되고 싶지 않지만, 눈이 흐려지기 이전에 만끽했던 '보는 모험'의 추억에 매달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보는 것'을 예술로 생각하지 않고 평이한 행위로 본다. 다이아몬드 세공사나 배의 선장, 조류 탐사자, 별을 보는 사람들, 글을 교정하는 사람들, 화가들은 눈을 훈련시켜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도 정확하게 볼 줄 안다.
하지만 보통 살마들은 봐야 할 것을 보지 않고 표면적으로만 눈을 이용한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라는 말이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눈이 불편해지면서 나를 둘러싼 현실이 점점 뿌옇게 변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게 어떤 것이었는지, 어떻게 볼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게 뭔지 계속 반추해야 했다.
--- pp.6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