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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
임진왜란의 전략적 요충지

진주성 전투

진주문화를 찾아서-14이동
지승종 저 / 김용철 사진 | 알마 | 2014년 12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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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12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272g | 140*190*11mm
ISBN13 9791185430447
ISBN10 11854304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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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지승종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분야는 한국사회사이며 주된 관심사는 조선시대 노비의 사회사다. 주요 저작으로는 《조선전기 노비신분 연구》와 《근대사회변동과 양반》(공저) 들이 있으며, 진주성 전투에 관해서는 〈16세기 말 진주성 전투의 배경과 전투 상황에 관한 연구〉(《경남문화연구》 17)를 썼다. 근래에는 ‘유불 교대儒佛 交代’를 화두로 삼아 우리 전통사회의 문화적 변동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진주에 와서 산 지도 30년이 조금 넘었는데 진주사람이 되고자 했던 초심은 아직 이루지 못한 듯하다. 《진주성 전투》가 그러한 부담을 더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진 : 김용철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를 나온 뒤 경성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학 석사학위를 받고 중부대학교 대학원에서 분장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진주보건대학, 중부대학교, 경남대학교에서 초빙강사와 겸임교수로 사진 및 분장을 가르친다. ‘자연과 인간’ ‘프랑스·이집트 기행전’ ‘농무’ ‘기독교 성지순례’ ‘당산나무’ 등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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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현재의 진주성은 진주성 전투의 진정한 역사적 기념물이 되기에는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 오늘의 진주성은 진주성 전투 그때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진주성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축조된 내성內城에 해당하며, 따라서 내성의 성문인 촉석문과 공북문은 진주성 전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격전이 치러졌던 동문과 신북문 그리고 구북문 등은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당시 성문 가운데 홀로 남은 서문은 문루도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다. 진주성의 성곽을 복원하는 일은 앞으로도 이루어내기 힘들 것이나, 구북문의 복원 정도는 성의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아쉬운 바는 진주성에서 민民의 모습이 아예 사라졌다는 점이다. 본래 성내에도 많은 민가가 있었고 더욱이 진주성 전투는 군과 민이 합심해서 치러낸 전투였다. 현재의 텅 빈 진주성의 모습은 ‘호국의 성지’ 이미지와는 부합할지 모르나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 수성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민의 모습을 지혜롭게 살려낸다면 진주성 내의 많은 공간을 좀더 유의미하게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9

진주대첩과 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과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전장戰場은 동일하되 두 전투 간의 연속성은 없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진주대첩의 복수전이라고 하는 것은 침략자 일본군이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두 전투는 피아간 전투부대의 구성 등 많은 면에서 서로 다른 별개의 전투였다. 그러므로 진주대첩을 반드시 ‘제1차 진주성 전투’라고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전투를 제1차 전투와 제2차 전투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럴 경우 진주성 전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두 전투를 연속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는 제2차 전투의 결과를 최종적 결과로 받아들여서 진주성 전투 전체를 패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잘못된 이해다. --- p.16

천험의 요새 진주성
진주성은 촉석과 남강 그리고 대사지가 함께 어우러져 영남 제일의 형승을 뽐내었을 뿐 아니라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진주성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바와는 달리 처음부터 산성山城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각종 문헌에서 흔히 촉석산성이라 했던 것이다. 또 성안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과 샘이 각각 세 곳 있었고 남강의 풍부한 수량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으니 성의 필수조건인 용수用水의 측면에서도 진주성은 모자람이 없었다.
하륜은 〈성문기〉에서 성이 완성되자 ‘일당백’이 되어 왜구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니 진주성에 의지하여 경내가 평안해졌다고 썼다. 이처럼 소수의 병력으로도 능히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진주성이었다. --- p.30~31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는 10만에 가까운 적군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적의 대군을 맞이하여 위기에 처했지만, 장기간 포위에 따르는 식량 부족 문제만 없다면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곳이 바로 진주성이었다. 살핀 바와 같이 진주성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분히 신뢰할 만한 천험의 요새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주성 전투의 바탕에는 아군의 장기인 수성전에 대한 자신감과 더불어 진주성의 견고한 성지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 p.38

임진왜란 일어나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대마도에 모여 있던 일본군 가운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대마도주) 등이 인솔한 제1진이 바다를 건넜다. 부산포와 동래를 차례로 함락한 일본군은 전장의 피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서울을 향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오랜 세월 전란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왔던 이 땅의 백성들이 일본군의 총칼 앞에 유린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 p.41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이니
일본군은 처음에는 진주로 진출하는 길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려 나서지 않았다. 진주에서 산음·함양을 거쳐 팔량치를 넘는 길보다는 의령 정진에서 거창·안음을 거쳐 육십령을 넘는 길이 더 좋은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북상하던 일본군은 정진과 거창을 경유하는 호남 침입로가 곽재우·김면金沔 등이 이끄는 경상우도 의병의 활약으로 봉쇄되자, 김산·지례에서 무주茂朱 쪽으로 우회하여 금산錦山 방면에서 전주로 나아가려 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금산·이치梨峙·웅치熊峙·진산 珍山·전주 등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는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호남 관군과 의병이 결사 항전하여 적을 좌절시켰다.
이렇게 남해 해로와 금산 방면 등의 육로가 막히자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두드러졌고, 이것이 적으로 하여금 대군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함으로써 아군의 방어 능력을 분쇄하려는 작전 계획을 세우게 하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진주는 경상우도의 보장인 동시에 호남의 보장으로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고, 그것이 사태의 진전에 따라 전쟁 국면의 초점으로 떠오르면서 진주성 전투의 막이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 p.49~50

진주성을 지켜라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올린 장계가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비로소 일본이 침략한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윽고 선조는 의금부로 하여금 김성일을 잡아들여 국문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 지난해(1591) 3월 1일 김성일은 통신사 부사副使로서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서 돌아와 복명(復命, 명 받은 일의 결과를 보고함)했다. 이때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 전쟁으로 인한 재앙)가 있을 것이라 아뢰었지만, 김성일은 그러한 정형(情形, 사정과 형편)을 보지 못했다고 아뢰니 두 사신의 주장이 대립했다. 김성일의 본뜻은 인심의 동요를 염려한 데 있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세를 오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만들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중죄를 안게 된 것이다.
4월 29일,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되어 서울로 향하던 김성일이 충청도 직산(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일대)에 이르렀을 때, 그를 찾아 내려온 선전관宣傳官을 만나니 뜻밖의 왕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 초유사 招諭使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였다.
초유사는 안집사安集使 등과 같은 임시 벼슬이었다. 글자 그대로 흩어져버린 군사와 백성을 ‘부르고招 타일러서諭’ 도로 모이게 하는 일이 그 주된 임무였다. 김성일이 초유사로 부임하여 주로 한 일은 의병을 지원하고 관군을 증강하는 것이었다. --- p.51~52

왜적의 칼끝이 진주성을 겨누다
이윽고 10월 1일 일본군은 함안과 진주의 경계에 있는 부다현富多峴을 아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넘었다. 부다현을 넘어온 일본군은 반성창 班城倉}을 불태웠다. 10월 2일에는 소촌역召村驛까지 진출해 진을 쳤다. 여기서 다시 10월 5일에는 임연대臨淵臺 부근으로 행군해 들어왔다. 이날 병력 대부분이 남강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날 일본군은 선봉 1,000여 기騎를 마현(馬峴, 말티고개)에 보내 진주성의 형세를 살폈다. …
임연대 부근으로 진출한 일본군의 위치를 알기 쉽게 풀어보면 대략 현재 문산읍 진주종합경기장 근처 강변 일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임연대는 랜드마크 구실을 할 뿐이고 일본군은 수만 명 규모의 병력이었으므로 반드시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경운은 《고대일록》에서 “왜적이 진주 경계로 들어왔는데 수미首尾가 100여 리에 뻗쳤다”라고 기록해두었다(《고대일록》 권1, 임진년 10월 6일). --- p.57~58

의병, 진주성을 구원하러 달려오다
이달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두골평頭骨坪에 진을 치고 왜적을 어지러이 공격하여 베어 죽였다. 그 후 10월 10일 최강·이달 부대는 진주성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을 반성班城까지 추격해서 20여 명을 참살했다.
망진산은 지금 이름과 같다. 간혹 망경산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으나 망진산이 올바르다. 그러나 망진산의 한자 표기는 문헌에 따라 ‘望晉山·網鎭山·網陳山·望陣山’ 등으로 달리 쓰인 경우가 많다. ‘그물 망 網’ 자는 비봉산 飛鳳山과 관련하여 붙은 것이다. 봉황은 그물을 보면 날아가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진양지》에서는 ‘望晉山’이라 하고 그 아래에 “《승람 勝覽》에서 이른바 망진望晉은 곧 망진網鎭이다”라고 설명했으니 진주 사람들은 ‘網鎭山’으로 흔히 썼음을 알 수 있다. 최강의 활약상을 기록한 《난중잡록》에는 ‘網陳山’으로 나온다. 망진산望晉山에 올라가면 글자 그대로 진주晉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望 수 있다. --- p.71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사용했던 조총은 납탄을 발사할 경우 유효 사거리가 100~200미터 정도이며 최대 사거리는 500미터 이상이었다. 명중률이 가장 좋은 거리는 100미터 이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50미터 정도에서 쏠 때 가장 정확했다고 한다. 이하 무기류에 대한 서술은 박재광의 논문 〈진주성 전투에서의 조·일 양국의 무기체계〉(《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에 따랐다. 신북문이 있던 곳은 지금의 진주 중앙광장 기업은행 진주지점 자리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수정산(금산)까지 거리를 지도상에서 대략 재어보면 550~600미터 정도다. 따라서 순천당산 위의 일본군이 발사한 조총의 탄환은 동문 쪽 성곽에는 일부 도달했겠으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정도의 타격은 주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p.86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하다
김시민은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힘써서, 밤이면 악공 樂工을 시켜 문루 門樓 위에서 피리를 불도록 하여 한가로움을 보였다. 적진에는 어린아이들이 매우 많았는데 서울말을 쓰는 아이도 있었고 사투리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성 주위를 돌아다녔다. “서울이 이미 함락됐고 팔도가 다 무너졌는데, 너희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찌 지킬 수 있겠느냐. 어서 빨리 항복하는 게 나을 거다. 오늘 저녁 개산介山 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 셋의 머리를 깃대 위에 매달아버릴 거야”라고 떠들어댔다. 성안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분노해 큰소리로 꾸짖으려 하자, 김시민은 말상대 하는 것을 금지했다.
【주】 개산은 김해 사람인데 그 아비가 임진왜란 초부터 일본군 편에 붙어서 성을 함락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진주성에 와서까지 ‘개산 아비’를 들먹일 정도면 꽤 악명이 높은 자였을 것이다. --- p.89

진주대첩을 이루다
4경 중(오전 2시쯤 된 시각)에 왜적이 두 패로 나뉘어, 1만여 명의 한 패가 동문 쪽 새로 쌓은 성벽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왜적은 각자 긴 사다리를 지녔는데, 화살이나 돌을 피하려고 어떤 자들은 방패를 짊어졌고, 다른 자들은 향교의 보궤(??, 향교 제사에 쓰는 그릇의 한 종류)를 머리에 쓰거나 멍석을 잘라 머리를 싸맸고, 그 밖에 쑥대나 풀을 엮은 것을 관 冠 삼아 쓰고 있었다. 왜적이 3층으로 된 가면 쓴 추인을 만들어 차츰 사다리 위로 올려서(즉 인형을 왜적처럼 보이게 해서) 아군을 속인 연후에 성벽을 기어올라왔다. 그 뒤를 따라 왜적의 기병(騎兵, 말을 탄 병사) 1,000여 명이 돌진해 들어왔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외치는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왜장은 거침없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다.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北隔臺에서,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甕城, 성문 방비를 위해 성문 밖에 지은 작은 성에)서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힘써 싸웠다. 혹은 진천뢰·질려포를 쏘고, 혹은 큰 돌덩이를 던지고, 혹은 불에 달군 쇠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러이 던지고, 혹은 끓는 물을 적에게 들이부었다. 왜적은 마름쇠를 밟은 자, 화살이나 돌에 맞아 죽은 자, 머리와 얼굴이 불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진천뢰 파편에 맞아서 죽은 왜적의 시체가 삼麻 줄기처럼 즐비했다. --- p.96~97

진주대첩의 의의
진주대첩의 성과는 거꾸로 일본에는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진주성 침공의 목표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막대한 손실만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패전의 쓰라림과 함께 일본군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는 군량 조달 문제였다. 진주대첩 결과 경상우도의 아군이 건재했으므로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는 여전히 불안했고 호남을 점령하지 못한 채 맞이한 그해 겨울 내내 군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진주대첩은 단순히 진주성 하나를 지켜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전쟁의 판세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진주대첩의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그만큼 당시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컸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진주대첩은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의 활약에 버금가는 공적이었고 육전陸戰을 대표하는 승첩이자 임진왜란의 3대첩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었다. --- p.101~102

진주대첩과 김시민
김시양의 말에 따르면,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체구가 크고 기상이 씩씩했다魁梧壯偉’ 하니 무인으로 타고난 풍모가 있었던 모양이나, 그의 생애 마지막 6개월 동안의 활약 이전에는 어떠한 명성도 얻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당대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신립申砬이나 이일李鎰 등과 같은 이들도 해내지 못한 커다란 공적을 이루어냈다. 그에게는 탄복할 만한 지략이라든지 무용담 같은 것도 없었고 백의종군과 같은 어떤 극적인 사건이나 일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김시민은 판관으로서 또 목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오로지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성실히 수행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임진년 10월, 진주성에 그가 있었고 끝내 대첩을 이루어내었다. 모종의 ‘입혀진 스토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와 같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모습에서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더욱 진실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p.106~108

다시 위기를 맞은 진주성
일본의 진주성 공격은 한 편의 복수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고, 그 배경에는 다른 중요한 전략적인 목적이 깔려 있었다는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 군사가 개입하던 무렵, 전쟁 상황은 이미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차단당하고 진주대첩에서도 패해 호남 지역 진출에 실패한 일본은 군량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 등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길어진 후방 보급로가 경상우도 등 각처 관군·의병의 활약에 위협을 받음으로써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고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책략으로 강화 교섭에 나섰던 것인데, 이것이 주효하여 일본군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그들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연해지역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부분적인 성공 따위는 그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낯선 땅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는 현실이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 p.113~114

중과부적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 때와는 명백히 다른 양상의 전투였다. 일본군이 거의 전군을 집중해 공격해오는 만큼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군사 작전이 수립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계사년 진주성의 비극은 중과부적衆寡不敵과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인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진주성은 방치되었고 사실상 버림받았다. --- p.124

고립무원
만약 김천일에게 ‘원군은 없다’고 확실하게 말해주었더라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진주성 수성전을 고집했을까? 수많은 민간인을 붙잡아두면서까지 절망적인 전투를 해야 한다고 끝내 고집했을까? 바보나 미치광이가 아닌 다음에는 그러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성군은 절대 열세의 불리함 속에서도 9일 동안이나 버텨내는 감투 정신을 발휘했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원군이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고립무원’은 김천일 등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원군을 보내지 않은 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계사년 진주성의 비극을 중과부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며, 비극을 초래한 잘못을 외로운 진주성을 목숨 바쳐 의롭게 지켰던 사람들에게만 돌릴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p.148

성은 무너지고 충절은 빛나다
왜적이 성에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이종인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해 일으키며 물러나 피하도록 권했으나, 김천일은 굳게 앉아 일어나지 않으면서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드디어 그 아들 김상건金象乾을 부둥켜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왜적이 성벽을 헐어 평지로 만들었다. 성중에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이었다. --- p.159

시 한 수, 이야기 한 편
“촉석루 안 삼장사는, 矗石樓中三壯士
한잔 들며 장강 물을 웃으며 가리키네. 一杯笑指長江水
장강의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넋은 죽지 않으리 . 波不渴兮魂不死”

진주성 전투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촉석루삼장사시’다. 학봉鶴峰 김성일이 초유사로 진주에 왔을 때 읊은 한시인데, 세간에서는 삼장사가 누구냐를 두고 분분했던 모양이다. 알려진 대로 학봉의 시 속에서 삼장사는 그 자신과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송암松巖 이로를 말한다. 그러나 글쓴이가 이 시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촉석루 안 삼장사’는 이 세 사람만이 아니다. 임진년과 계사년에 죽음을 무릅쓰고 진주성을 지켰던 이들 모두가 ‘장사’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그 모든 이의 넋 또한 남강의 푸른 물결과 더불어 길이 남으리.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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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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