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집는 맛이 없으면 즐거운 맛도 없다.” 인생은 배배 꼬이고 신산스러워야 제맛(?)이다. 아무 갈등 없이 주인공이 행복하기만 한 드라마가 재미있을 리 없다. 문제와 도전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삶은 의미심장하게 불타오른다. 그래서 몽테뉴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도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충고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 영혼의 뛰어남은 위대한 일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에서 드러난다.” 내 삶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다른 사람이 평가하지 않는다. 남들이 나에게 박수를 치건 비난을 하건, 그들은 결국 자기의 생활로 돌아가버린다.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고 갈 사람은 나 자신이다. --- p.20
스캇 펙은 “악은 태만에서 생긴다.”고 잘라 말한다. 매순간 반성하며 마음을 닦는 자세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해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남 탓과 상황 탓을 하는 편이 훨씬 쉽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기를 게을리할 때, 악은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뒤틀린 영혼은 숱한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의 무의식은 나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나의 인간관계는 왜 늘 험악해질까? 문제의 원인이 ‘나’여서는 안 된다면, 내 주변에는 성질 더럽고 이상한 이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착하고 정의롭게 살고 있음에도 인간관계는 왜 배배 꼬이는지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내 주위로 이상한 이들을 끌어들이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 --- p.69
일에 치여 바쁘게 뛰어다닐 때, 우리는 ‘차분히 생각할 여유’, ‘자신을 추스를 시간’을 간절히 바라곤 한다. 그럼에도 마침내 혼자 있게 되었을 때도 우리는 좀처럼 자신을 가다듬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거나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소중한 고독을 쉽게 날려버리는 셈이다. 이런 모습은 알코올 중독자와 다를 바 없다. 중독자는 자기 자신을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취해 있기를 바란다. 자신을 가꿀 수 있는 시간이 났을 때, 이들은 되레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을 약물을 애타게 찾는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컴퓨터를 켜는 우리 모습은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바우만은 “근육이나 상상력을 이용하여” 스스로 고독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충고한다. 성장은 고독을 즐기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 p.173
남부끄럽지 않은 자기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희망이 있을 때, 진학과 취업을 둘러싼 스트레스는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불안한 처지가 언제 끝날지 모를 때는 어떨까? 주변의 기대를 채워줄 만한 적당한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느낄 때, 아이들은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이쯤 되면 학교 폭력이 왜 성장통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지가 분명해진다. 대증요법(對症療法)처럼 위험한 치료도 없다. 대증요법이란 증상에만 매달리는 태도를 말한다. 다리에 통증이 있다고 진통제만 뿌려대는 식이다. 병을 고치려면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야 한다. 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엄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폭력이 사라질까? 이는 마치 굶어죽게 된 사람들한테 음식 훔치지 말라고 닦달하는 것과 똑같다. 학교 폭력을 잡으려면 좀 더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학생들에게 비전을 찾아주고 자신에게 알맞은 위치를 갖게 되리라는 희망을 돌려주는 것, 학교 폭력에 대한 진정한 처방전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 p.223
‘나를 있는 그대로 보듬어줄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은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상태로 높은 자리에 올라 부와 명예를 누리면 뭐하겠는가. 겉으로는 우러름을 받을지 몰라도, 스스로는 자신이 속 빈 강정임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불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저이만큼은 나의 가치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보듬어주었으면 좋겠다. 정말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모르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바라보고 인정해줄 것이다. 이런 바람이 과연 ‘현실적’일까? 이승욱은 “혼자서도 잘사는 사람이 둘이서도 잘산다.”고 말한다. 사랑이 헛헛하지 않으려면 상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