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돼.그러다 하늘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가슴만 아픈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맞아 본적 있니?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거야......'
--- p.85
편지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늦게도 내게 오지마
내 마지막 모습이 흉하거든 네가 수정해줘.
그날 내가 받은 이모의 편지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회색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서서히 세상 전체를 결빙시키려고 작정한 듯 시시각각 수은주가 내려가던 삭막한 2월의 어느날이었다.
모순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 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 모든 사람에게 행복하게 보여졌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이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 p.258 --- p.272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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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와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거라고 이모는 내게 죽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이무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 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에게 행복하게 보여졌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쳐졌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 p.272
이십대의 젊음 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과도 싸워 이길수 있는 천하무적의 무기이니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표현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말이었다. 그런 말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모든 되풀이 되는 일에는 내성이 생기는 법이었다. 나와 진모는, 모욕감을 느낀 어머니조차도 아버지 없는 생활에 하등의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슬픈 일몰에조차 꿈쩍하지 않을 내성을 갖게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겐 사랑에 꼭 필요한 맹목이란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막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이 하나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탐색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선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의 대가일 것이므로.
--- p.14,p.86,p.90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 한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 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사랑이란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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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잔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쓸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어머니의 불가사의한 활력, 이것도 앞으로 내가 유심히 살펴야 할 생의 비밀이다. 어머니를 탐구하면, 탐구해서 분석하면, 혹시 어머니의 그치지 않는 활력을 표현할 정확한 말을 찾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58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고 한 남자를 만나서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고는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아 버린 이 지리멸렬한 삶! '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하고, 말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어 무덤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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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한 번만 더 맹세코, 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다면, 평소의 나는 이런 식의 격렬한 자기 반성의 말투를 쓰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 p.8
만약 누군가 지금 대문을 들어서서 방 쪽을 쳐다본다면 아마 이런 그림이 보일 것이다. 환하고 어둡고, 다시 환하고 어둡고, 다시 환한 빛의 그림. 두 번의 어둠은 욕실과 부엌이 자아내는 것이고 세 번의 환한 빛은 세 명의 가족이 각각 하나씩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언제부턴가 늘 이랬다. 두 개의 방을 비우고 하나의 방에 모여서 단란한 풍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처럼 늘 이랬다.
그래도 어머니는 요즘 무척 행복할 터였다. 진모가 무슨 생각인지 매일 저녁 늦지 않게 돌아와서 자기 방에 불을 박히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표정은 저절로 환해졌다. 냉장고 속에 진모가 좋아하는 갈치 토막이 빠지지 않는 것도 다 그 탓일 것이었다. 나는 절대 갈치를 좋아하지 않앗다. 어머니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갈치는 아버지가 몹시 탐하는 생선이었고 그래서 진모가 그 습성응 물려받은 것이므로.
갈치라니,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쁘진다. 라일락 향기에 갈치 비린내가 마구 섞이고 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창문을 있는대로 활짝 열어 젖힌다. 있는 대로 활짝이라고 해봤자 내 방은 가운데에 끼어 있어서 뒤꼍으로 뚫린 구멍 수준의 창 하나가 고작이다. 오직 나뿐인 창문에 턱을 괴고 뒷담장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진모 방의 열린 창문으로 한껏 낮게 깔고 있는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린다. 44p
'좋지요? 이 집을 선택한 것은 경치도 경치지만 '그날 오후'라는 찻집 이름이 캡이었어요. 먼 훗날, 진진씨와 내가 앉아서 그날 오후, 우리가 그곳에서 차를 마셨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은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68p
그러나 이모부에 대한 내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이 지난 뒤에 홀로 정리한 생각이지만, 우리가 이모부를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리와 주혁이는 이모부의 자식들이었고, 나와 진모는 술주정뱅이의 자식들이었다. 이모부가 누구를 더 사랑했겠는가. 생선살 한 젓가락 우리이게 떼어 주기를 아까워했던 이모부지만 아버지의 사업 자금으로 갈치 백 마리, 아니 천 마리, 만 마리 살 만한 돈을 빌려 주었고 결국 돌려받지 못했어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을 어머니는 왜 잊고 잇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모처럼 갈치를 탐하는 식성이 아닌 탓에 내가 이모부에게 관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빛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 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16p
그러나 다시 붉은 황토의 밭들이 나타나고 육지의 마을들이 차례차례 스쳐갔다. 나는 바다를 잊을 수 없어 연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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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마디... 일년전 쯤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것이다. 실수는 되풀이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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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 할 일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 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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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달이든 석 달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에 어떤 표시가 나타나야 결혼을 결정하게 되는 것인지 나는 정녕 알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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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장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내 시선에 노출된 그의 검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겨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김장우의 손도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의 지프가 주차장 구석에 세워져 있던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김장우도 충분히 주위의 시선을 고려한 뒤에 내 이마에 손을 얹었을 것이라고도 짐작했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잇었다. 우리는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밖을 보고, 그는 나를 보고.
그날 오후, 우리의 자세는 그렇게 고정되었다. 나는 시종일관 밖을 보았고 그는 운전하는 틈틈이 나만 보았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바깥을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나는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이 난 후부터 나는 나를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김장우는 언제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나처럼 이렇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 혹시 있었느냐고 의논하고도 싶었다.
바다는 다시 보아도 좋았다. 간간 고깃배가 떠 있고 고깃배 위로 뭉개구름 몇 조각이 친구하며 따라가는 풍경을 지나자 가파른 절벽 밑의 푸르른 물결이 나타났다. 미풍에 흔들리는 물결은 자잘하고도 섬세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저 바다에 광풍이 불기도 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