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 ruru100@yes24.com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전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는 명저이지만,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90년대 초 방영된 한 청춘드라마에 소개되고 난 다음부터이다. 대학생인 주인공이 들고 다니던 이 교양서는 낭만적이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풍기기에 충분했고, 굳이 읽지 않더라도 외투 주머니에 폼나게 꽂고 다닐 만큼 매력적인 제목이었다. 물론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이 토닥거리며 싸우는 연인들을 위한 말랑말랑한 사랑학개론은 아니었으니, 몇 장 읽다가 마주친 성서 속 주인공들과 리비도 같은 철학용어에 이내 손을 들었을 사람도 꽤 많았겠지만 말이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능력과 기술들을 제시하고 있다. 머리말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 프롬은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기술'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익히고 싶다면 음악이나 미술, 건축이나 의학의 기술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러한 심리적 배경의 원인을 짚어가며 잘못된 가설에 대한 오류를 밝힌다. 그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요소, 현대 문화의 특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하다.
프롬은 사랑을 한 사람과 그 대상자의 관계로 파악하는 개인적 의미가 아닌, 사랑이 지닌 사회적 관계로 이해한다. 즉, 사랑이란 특정 대상이 아닌 전체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와 성격의 방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이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共棲)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사랑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태도의 유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사랑하는 둘 사이의 배타적 관계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활동성을 간과한 오해이며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착각에 불과하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만일 진정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이 넓어지고 타인에 대해 배려가 깊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물론 그것은 만족감으로 인한 일시적 태도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프롬은 사랑의 본질을 활동적이며 능동적으로 보고 있고, 따라서 강렬하게 빠져드는 감정만이 아니라 결단이고 판단이며 약속이라고 말한다. 결국 타인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좀 더 심오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 논리에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프롬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다소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랑이란 스스로가 바꿀 수 있는 교환가치의 한계 내에서 최상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던가. 사랑은 이러한 교환의 매커니즘 속에서 생겨나며, 그것은 프롬의 말을 빌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지만, 그리하여 인간적 합일을 경험할 수 없는 현대인들은 끊임없는 고독과 불안을 느끼며 방황하게 된다.
사실 사랑이란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한 문제이고, 그것은 단순한 지식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의 본질로부터 사랑의 대상과 종류를 파고드는 이 책은 추상적이고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기술』이 유효하게 느껴지는 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소외를 경험하고 고독감을 느끼지만 그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을 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독한 현대인들을 위해 프롬만큼 사랑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있게 연구한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이해한다는 것은 자유롭고 건전한 인간의 의지를 믿는 일이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