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 희생과 봉사를 주장하는 세 종교인이 민족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도덕성이 점점 타락하고 더 심한 부정부패가 민족의 진로를 방해한다면, 그 책임을 어미에 물어야 할 것인가? 그 책임이 세 종교에는 없는가? 성당의 우렁찬 종소리와 미사도, 교회에서 새벽마다 울부짖는 통곡의 기도도, 절간의 목탁 소리도 민족을 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증거인가? 혹은 한국의 종교들은 각 개인의 축복과 구원만을 추구하는 이기집단인가? 그렇다면 그런 종교는 우리 사회에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그런 종교는 도리어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세 종교가 인구이 반이 넘는 심도들에게 천문학적인 숫자의 헌금을 걷어들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국민과 사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난한 신도들의 주머니를 터는 해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의 존재 가치를 저울질해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 머리말 중에서
기독교는 친미 반공의 상징이었다. 강원용 자신도 그덕을 꽤 보긴 했지만, 당시의 그런 현실을 묘사하는 강원용의 마음이 썩 흡족할 리는 없을 것이다.
"원래 평양은 일제 때부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세력이 전국에서 가장 융성했던 곳이었다. 따라서 국군이 입성한 평양은 그 동안의 박해에서 벗어나 해방을 만끽하기는 해도 교회를 없애지는 않은 상태여서 모든 교회들이 매일 종을 쳐 사람들을 모으며 해방된 세상을 축하했다. 게다가 길거리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완장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청년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국군이 기독교신자라면 무조건 관대히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평양 시내는 온통 기독교신자로 꽉찬 것처럼 보였다."
또다시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가 친미, 반공의 상징이라고 하는 사실은 적어도 목사들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집에 도착해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피난 갈 준비부터 서둘렀다. 이번에는 멍청하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차편도 없고 돈도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마침 미 선교부가 목사들의 피난길을 주선해준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군 사령부에서 군목을 하던 윌리엄 쇼라는 사람이 앞장을 서서 각 교단의 목사와 가족들을 부산까지 피난시킬 기차편을 마련해주고 한 가족당 5만 원씩 돈도 제공해주게 된 것이었다."
---pp.132~133
“한국의 초기 개신교인들 중의 상당수는 분단 고착화와 반공 지상주의를 건설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반공의 선봉장이었다. 그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권력에 깊숙이 개입해 한국 종교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강인철) (11쪽)
이제 더 이상 종교는 성역이 아니다. 과거처럼 종교를 계속 성역으로 간주하는 한 한국 사회엔 희망이 없다. 이제 우리는 언종유착-권언유착-권종유착의 3위1체적 유착의 유산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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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기 개신교인들 중의 상당수는 분단 고착화와 반공 지상주의를 건설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반공의 선봉장이었다. 그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권력에 깊숙이 개입해 한국 종교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강인철) (11쪽)
이제 더 이상 종교는 성역이 아니다. 과거처럼 종교를 계속 성역으로 간주하는 한 한국 사회엔 희망이 없다. 이제 우리는 언종유착-권언유착-권종유착의 3위1체적 유착의 유산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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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리브리스4 진중권-
만약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자기도 돈을 찔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떨까?' 그녀는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한마디 해주었다. '바로 그 때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니겠어요? 옳은 길로 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서 다 알아서 해주실 거라는...' 내가 이해하는 신앙은 이런 것이다.
---183, 184p
인간을 양에 비유한다는게 주체성이 강한 근대적 인간들에게는 어쩌면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세계는 필연과 우연이 함께 어울어져 만들어내는 드라마다. 필연은 인간의 힘으로 예측이 가능하나 인간의 힘으로 우연이 개제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때론 위험한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지력을 동원하여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내릴지라도,그 결정이 반드시 현실 속에서 원하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이때에 인간이 할 바를 다 하고, 나머지는 신께 맏기는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이란 어투로만 존재하는 껍질이 아니라 좀더 깊숙한 근원을 가져야 한다.
---188p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