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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박범신 | 창비 | 2000년 1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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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87쪽 | 429g | 153*224*20mm
ISBN13 9788936436582
ISBN10 8936436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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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박범신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20여권의 장편소설과 창작집을 펴냈으며, 1999년 계간 <시와 함께>에 「놀」외 19편의 시를 발표하는 등 시인으로도 활동중이다. 1981년 대한민국문학상을수상.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소설집으로 『토끼와 잠수함』『덫』『식구』, 연작소설 『흉기』『흰소가 끄는 수레』등이 있다. 장편소설로는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눞다』『돌아눕는 혼』『겨울강 하늬바람』『불꽃놀이』『숲은 잠들지 않는다』『우리들 뜨거운 노래』『불의 나라』『물의 나라』『잠들면 타인』『황야』『수요일은 모차르트를 듣는다』『틀』『킬리만자로의 눈꽃』『침묵의 집』등과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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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이미 한 번 죽은 여자에요. 제발, 비웃지 마세요. 미친년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구요. 저는 박미숙이지만 세상 속에서 저는 정혜림이에요. 정혜림의 침대에서 자고 정혜림의 옷을 입고 정혜림의 목소리를 가졌어요. - 세상의 바깥
--- p.
밤이 어디에서 오냐 하면 말야, 우물에 축축한 검은 옷을 입고 숨어 있다가 말야, 해가 지면 말야, 슬그머니 나와 사철나무 밑에다가 커다란 검은 물레 같은 걸 떠억 갖다놓고 말야, 이렇게 장대보다 긴 팔로 이렇게, 물레를 돌려서, 연기 피우듯이, 온세상으로 어둠을 피워놓걸랑.
--- p.106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젊고 이뻤다.

말수가 아주 적었으나 늘 웃는 낯이었으며, 잇속이 하얗고 속눈썹은 유난히 길었다. 꽃을 좋아해서 낡은 관사 앞의 좁은 마당일망정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었고, 라일락이던가, 화사한 꽃그늘 아래로 들면 담밑 철망 안에 어머니 잇속처럼 하얀 털에 둘러싸인 토끼 한쌍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소망을 받아들여 아버지가 어렵게 구해온 흰토끼 한쌍을 위해 직접 철망을 구해다가 얼기설기 토끼집을 만들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했다. 내 손을 잡고 갈앙산으로 토끼풀을 뜯으러 갈 때 어머니는 곧잘 낮은 목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청아하고 달콤해서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매양 잠이 왔다.

왜 그런 것들을 잊고 있었을까.

가시가 박혔던 자리를 어머니가 핥고 빨아주기 시작했을 때, 내가 울음을 뚝 그쳤던 생각이 비로소 났다. 만상홍엽의 자주빛이 어머니의 분통같이 뽀얀 앙가슴에 고요히 깃들여 있었다. 히힛, 간지러 … 간지러워, 엄마. 몸을 꼬며 내가 비명을 질렀던가. 그래, 그랬었어 … 라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에서 섬광 같은 유성이 지고 있었다. 훈련중인 미군 스리쿼터에 받혀 어머니가 죽은 것은 그해 겨울 눈내리던 날 새벽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술국을 끓이려고 콩나물을 사러 나가던 어머니는 차의 정면에 받혀 허공에 붕떠올랐다가 추락했다. 목뼈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나, 맥주 좀 시켜줘요.

그녀가 견딜 수 없다는 듯 볼멘소리로 말했다.
--- p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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