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살 수 있을까?
물론,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평정심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습득한 사고, 감정, 행동의 패턴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이미 우리와 강하게 유착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기존 패턴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여, 평소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만일 선택을 원치 않는다면 기존의 굳어진 사고, 감정, 행동 패턴을 거의 기계적으로 따를 수도 있다. 그러면 늘상 일어나던 일이 일어나게 된다. 반면 지금까지 따라왔던 ‘자동 조종 장치’를 끄고, 굳어진 습관을 버리고자 노력하며 새로운 습관이 자리 잡기까지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을 ‘수동 조종’할 수도 있다. 이런 선택의 실행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멍한 상태로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압박에 저항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이 더 이상 전처럼 쉽게 마음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일상의 스트레스로 인해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대놓고 비판을 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시기심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당신을 예전의 모습으로 원상 복귀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자기들처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평정심이 있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도전 과제로 다가온다. 다르게도 살 수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평정심이 있는 사람은 스트레스로 인해 괴로워하는 태도가 당연한 것이 아니며, 특정한 사고 내지 행동 방식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본문 14~15페이지 중에서)
과장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기본적으로 아주 간단하다. 원하는 것보다 더 화가 나고 걱정되고, 실망스럽다면 (지나친 열광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상황을 부풀리고 과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끔찍해”, “끝장이야”, “참을 수 없어”, “대박이야”, “끝내주는군” 같은 생각들이 당신 머릿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실은 끔찍하지도 않고 환상적이지도 않다. 그냥 그렇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쾌한 것과 유쾌한 것을 부풀려 판단하면서 극과 극을 오간다. 하늘로 솟아오를 듯 환호했다가 금방 죽을 듯이 우울해한다. 그렇게 늘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상태의 선두를 달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히스테릭하다’고 표현한다. (...) 공황, 우울, 분노의 폭발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과장이 나쁘다는 것은 십분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감동하고 좋아하는 일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많이 감동하고 많이 좋아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거지? 너무 높이 올라가면 언젠가 추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하늘(‘행복의 절정’에 대한 비유)’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어느 순간 긍정적 평가도 과도한 경우에는 현실에서 지탱하기 어렵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실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유지해나갈 수 있다면 무방하겠지만, 한번 과장하기 시작하면, 대부분은 반대 방향으로도 금방 과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주 대단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나중에는 아주 시시해 보이게 된다. 어느 쪽이든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본문 51~52페이지 중에서)
생각을 편안하게 바꾸는 첫걸음
알랭 레네 감독의 ‘내 미국 삼촌My American Uncle’이라는 영화에서 “나는 곧 다른 사람들이야”라는 말이 나온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각자가 독특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지만, 사실 살아오면서 줄곧 주변의 영향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우리 역시 계속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서 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당신의 생각이 똑같은가? 당신은 누구와 특히 생각이 잘 맞는가? 친구? 부모? 선생님? 동료? 이웃? 당신이 보는 일간지? 당신이 보는 텔레비전 방송? 당신이 듣는 라디오 방송? 당신은 누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사는가?
다른 사람과 의견이 같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를 그것이 맞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가? 그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아는가? 다수가 아는 것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진실로 여겨오던 것도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날 수 있다.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 견해 역시 언제든 시험대에 오르며, 시험에서 견딘 것은 살아남고 나머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 다수도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소수 역시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다수결 투표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이 무엇을 믿을 것인지,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진실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도 일방적인 생각인 건 마찬가지다. 에픽테토스의 말을 약간만 바꾸면, 진실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의식하는 것은 진실과 평정심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무턱대고 어떤 확신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그것이 사실과 어긋나며 스트레스를 유발할 뿐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 생각을 바꾸면 된다. (본문 146~147페이지 중에서)
생각의 휴식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이 불안해지는 이유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과 생각을 편안하게 하여 평정심으로 돌아가는 사고 원리를 살펴보았다. 이제 여러분은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내적인 고요를 누렸으면 좋겠다고 바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의심하거나, 생각을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생각을 놓아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결국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보고 들을 뿐 아니라, 모든 감각적 인상들을 판단하고 감정과 연결시킨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분류가 가능하게 된다. 좋은 것, 나쁜 것, 그저 그런 것, 혹은 유쾌한 것, 불쾌한 것, 중립적인 것. 따라서 견해를 만드는 것, 기억하는 것, 미래를 내다보는 것뿐 아니라 지각하고 주의를 돌리는 것도 우리 정신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이 여기저기로 뜀뛰기를 하는 경험을 한다. 때로는 한 가지 주제를 빙빙 도는 것 같은 순간도 있다. 생각은 마치 제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떤 생각들은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듯하다. 이쯤에서 묻자. 누가 누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
정신적으로 놓아주고 붙잡는 것은 어떨까? 어떤 대상에게 주의를 기울이면 가장 먼저 접촉이 일어나고, 이것이 계속되면 연결이 일어난다.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내면에서 대상을 붙잡는 힘은 더 강해진다. 이런 과정을 흔히 ‘집중’이라고 부른다. 생각을 어떤 일에 머물게 하고 싶어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될 때가 있다. 반대로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고 싶은데 생각이 어딘가에 계속 붙들려 있을 때가 있다. 왜 그런 걸까? 의식적으로 주의력을 조종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필요에 따라 주의력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면서 다른 것에 한눈팔지 않고 하나에 집중한다. 주제를 바꿀 필요가 있을 때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린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뜻하는 대로 주의력을 집중시키거나, 대상을 바꿔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서투르다.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아서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서 뭔가를 잡거나 놓아주는 것처럼 주의와 관심도 어떤 대상에 집중시켰다가 다시 놓아줄 수 있다. 한 가지 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마음으로 그 일을 붙잡을 수도 있고, 거기서 관심을 돌려 놓아줄 수도 있다. (본문 154~157페이지 중에서)
삶을 누리기 위한 전제 조건
목표는 중요한 것이지만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말라. 일단 목표를 세우면 무엇보다 그리로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당신은 그 과정을 유쾌한 여행으로 만들 수도 있고, 고생길로 만들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여가 시간마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버거운 계획을 세우고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스케줄이 빡빡할수록 더 좋다고 믿는다. 그러고는 피곤에 절어 자유 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며 탄식을 한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매일을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라. 그런 마음 역시 완벽주의와 업적주의에 물든 마음이다. 한 번씩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괜찮다. 그런 날들을 허락하면서 내면의 자유를 만끽하고 매일, 매시간 충만하게 누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라.
삶을 누리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강박이 없는 내면의 자유로움이다. 누려야 하는 강제 조항이 아니라,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한 것이다. 사회가 업적 위주로 치닫다 보니 사람들은 삶을 향유하는 법을 도무지 배우지 못한다. 십계명에 ‘삶을 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계명은 없는데도 많은 사람이 암묵적으로 그것을 열한 번째 계명으로 삼았고, 다른 계명보다 이 계명을 훨씬 잘 지키고 있다. 누림의 비결은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할 때는 되도록 작은 단계로 나누어서 하고, 양보다 질을 우선시해야 한다. 적은 것이 많은 것임을 명심하라. 속도는 현대 사회의 신조이다. 옛날에는 해가 뜨고 지는 것, 계절이 바뀌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갔다면, 이제는 일분일초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시류를 거슬러야 한다.
한 걸음씩 내딛는 것으로 만족하라.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고, 무엇인가를 꼭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 (...) 삶을 누리는 것은 상황이나 우연에 달려 있지 않다. 지각하면서 편안하게 집중하면 된다. 누림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기분 좋은 일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아름다운 것과 유쾌한 것에 대한 명상을 시작하라. 우연히 주어지는 기분 좋은 것들에도 마음을 열어라. 그렇게 하는 훈련에 익숙해지면 삶을 누리는 데 더욱 고수가 될 것이다. (본문 232~234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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