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대해 깨달은 지금,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그 당시 나는 믿음의 가면을 쓴 위선자였다. 그런 종교적 형식 자체를 믿음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그 착각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일생을 마칠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아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머리글」중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길어야 일백 년을 사는 인생, 그 이후 영생과 영벌, 즉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 충격적인 말씀을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미래를 위한 삶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죽음, 그 무한의 세계」중에서
신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추진해서 나타난 결과를 무조건 신의 뜻이었다고 과대 포장하거나 핑계를 대어서는 안 된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결과에 상관없이 그 과정에서 발휘된 의지가 신의 의지가 아닌 개인의 욕구에 의한 자유의지였다면, 그 결과에 대한 공로나 과실은 자신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믿음 안에 있다는 사람들 가운데 때때로 자신이 실패했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신의 뜻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을 신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자신의 삶을 신에 대해 순종하는 삶으로 미화하려고 하는 경우를 본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개인의지에 의한 욕심과 무능의 결과라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비겁한 위선이다.
---「하나님의 뜻」중에서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는 부자가 지옥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나사로는 부자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그의 대문에서 빌어먹던 거지였다. 그 나사로를 보고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하는 내용이다. 지옥 불 못의 고통을 참다못한 부자는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그릇도 아니고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신의 혀에 대 달라고 애원한다. 이것으로 보아 지옥은 인체가 느낄 수 있는 고통과 자극을 영혼이 그대로 느끼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곳은 구더기처럼 연약한 생명체라도 죽지 않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고통스런 형벌의 공간이다. 그런 지옥으로 갈 바엔 차라리 죄에 노출되었던 발을 찍어 버리거나, 눈을 뽑아 버리거나,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지옥에는 안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지옥, 가서는 안 될 곳」중에서
율법의 제사에서는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죄를 지을 때마다 매번 살아 있는 흠 없는 동물이 대신 죽어야 했고, 그 제물의 피를 제단 뿔에 바름으로 죄를 덮어야 했다. 그런 동물과 피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직접 사랑하는 자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준비하셨다. 그 독생자 예수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단 한 번의 완전한 피의 제사를 직접 십자가 위에서 드리심으로, 인간에게 죄로 인해 깨져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가야 할 슬픈 운명의 인간들에게 소망의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중에서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말씀의 거울 앞에서 그런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며, 죄로 인해 더러워진 자신의 치부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서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죄라 함은 우리가 일상에서 지은 양심과 행위에 관련된 죄이기도 하지만, 이런 작은 곁가지가 아닌, 더 중요하고 깊은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우리에게는 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깨닫고, 스스로 확증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 사함」중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는 함께하던 교회나 말씀을 가르치던 교회 지도자 없이 각자가 홀로 서야만 한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필요한 것은 선행도, 구제도, 봉사도, 십일조 같은 헌금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그 대속을 믿는 믿음밖에 없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섰다면 그때는 이미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엉뚱한 허상을 좇다가 구원의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무서운 지옥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중에서
예배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드리는 형식적 의례가 아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은 자들이 때와 장소에 매이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믿음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교회에 쏟는 정성과 관심을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배」중에서
정의와 공평을 이 땅에 펼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또 그 사랑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교회라면, 교회의 규모가 크든지 작든지,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인간의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이웃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 해외 선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가까운 그늘진 곳에 있는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인 영혼 구원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사랑」중에서
따라서 교회는 건물의 크기나 성도들의 숫자 같은 외형적인 규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이 모여서 말씀을 통해 서로 교제하며,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기본 사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며 좋은 교회임은 물론이다.
---「성경적인 교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