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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유배지 답사기

남해 유배지 답사기

박진욱 | 알마 | 2015년 03월 0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1 리뷰 13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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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3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616g | 165*209*30mm
ISBN13 9791185430515
ISBN10 118543051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박진욱
박진욱은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다. 책을 낸 뒤 학교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갔다. 밀양에서 무농약, 저농약 농사를 짓다가 실농을 거듭했다. 중국 루동대학교魯東大學校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중국을 여행했으며,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지리산 자락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기차 타기가 수월찮아요, 암표를 이용하세요”: 중국 배낭 여행》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 《평범한 글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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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량 바다 건너기
200여 년 전, 한 나그네가 노량나루에 서서 흘러가는 바닷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한양을 떠나, 남해섬으로 귀양 가는 류의양이었다. 노량나루에서 느꼈던 것을 《남해문견록》에 적었다.

신묘 영조 47년(1771) 2월 26일 오전에 노량 나룻가에 달하여 배 오기를 기다리다. 물 너비는 한강의 서너 배 되는 물이 그리 멀지 아니하고 바람이 없어 물결이 잔잔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나루는 순진順津이라’ 한다. 또 내가 바닷배 건너기 처음이로되 구태여 무섭지는 아니하나 북으로 바라보니 운산이 첩첩하고 가국家國이천리 밖에 있는지라. 뭍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뭍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노량 바다를 보고 마음이 처량하였을 것이다. 노량을 건넘으로써 비로소 귀양살이가 시작될 것이고,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이 물을 건너오랴? 기약 없는 뱃길이었다.
다시 2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몇몇 사람이 노량나루에 서서 흘러가는 바닷물을 참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흰 옷을 입은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었다. 이때의 일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정유년 7월 21일(1597년 9월 2일)
맑다. 곤양군에 이르니 어떤 백성들은 이른 곡식을 수확하기도 하고, 어떤 백성들은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난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년 4월 1일 옥문을 나와 6월 8일 합천 초계의 권율 장군에게로 가서 백의종군했다. 7월 18일 원균이 거제도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고 왜적에게 잡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권율 장군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자 이에 ‘내가 직접 바닷가로 가서 보고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는 7월 21일 남해 노량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이곳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졌다._16~17쪽

* 김구의〈화전별곡〉
〈화전별곡〉이 남해의 찬가라고 《남해향토사》에 적혀 있다. 이는 제1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망운산이 있고 호걸준걸 모인 섬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선비들이 먹고 노는 모습을 그렸다. ‘박교수 술에 취해 이리저리 손 휘젓는 버릇(2장)’ ‘몸맵시 잘 빠진 학비, 못생긴 옥지(3장)’ ‘소반도 두드리며 간혹 잔대도 치고(4장)’ ‘녹파주, 소국주, 황금빛 닭고기, 흰문어(5장)’ 〈춘향뎐〉의 변학도 생일잔치 빰치는 놀이판이다. 이 사람이 정말 도학정치를 논하던 기묘 명현이 맞으며, 귀양 온 사람이 맞는가? 이를 두고 남해의 찬가라고 하면 이는 남해 사람들을 욕보이는 일이 아니겠는가.
제6장에 이르면 탄식으로 흘러간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단 말인가. 내 나이 갓 서른, 서울을 잊기에는 아직도 젊다. 아직도 기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임금은 나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겨옵셔 들어주던 옥당의 글 읽는 소리, 임금겨옵셔 내리신 향기로운 술과 따뜻한 담비털의 성총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눈에 어른거리는 당상관의 붉은 대문 집, 그러나 머리를 흔들어버린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서울은 멀고 몸은 외로운 섬 남해에 웅크리고 있다. 찬란했던 시절은 사라지고 초라한 귀양살이만 남은 것이다._45쪽

* 사람을 끌어당기는 관음포
오실에서 왼쪽으로 가면 포상이다. 포상의 옛 이름은 ‘개뫼’다. 개펄 위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개뫼라는 말뜻대로 보면 포상 아래에 있는 지금의 논은 모두 개펄이어야 한다. 곧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말이 된다. 연필로 오실, 관당, 포상 그리고 정지석탑이 있는 탑동을 이으니, 길쭉한 타원형의 들판이 된다. 들판을 바다로 바꾸면 길고도 깊숙한 관음포가 된다. 비로소 나는 옛날 관음포의 지도를 완성시켰다.
이 바다에서 두 차례 대해전이 벌어졌다. 모두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해전이고, 왜구가 결딴이 난 전투다.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데에는 이 바다가 한몫을 했다. 관음포가 한몫을 할 수 있는 데는 다른 바다가 가질 수 없는 모양과 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하동이 보이고 육지 사이로 쩍 갈라진 곳이 하동 포구다. 저기서 섬진강 물이 흘러나와 밀물을 타면 관음포로 밀려든다. 대장경판의 목재가 그렇게 섬진강물을 따라 관음포로 들어왔을 것이고, 왜적들이 그렇게 흘러들어 왔을 것이다._100~102쪽

* 청 장군이 하룻밤에 쌓은 대국산성
이 많은 돌을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산 속의 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니, 저 아래 바닷가에서 옮겨왔을 것이다. 식당 어른이 지금도 조개껍데기가 붙은 돌들이 발견된다고 하니. 장정들이 두어 개의 돌을 지게에 지고 끙끙거리며 대국산으로 오르는 모습이 상상된다. 대역사였을 것이다. 남해설천 사람들에게는 만리장성 못지않았을 것이다.
방언조사를 하느라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호미, 소쿠리 따위를 들고 “이건 뭐라 합니까?” “저건 뭐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쓸데없는 거 묻는다며 퇴박을 놓고는 슬그머니 청 장군 이야기를 꺼냈다. 이 동네서도 듣고, 저 동네서도 듣고, 대국산을 빙 돌면서 청 장군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었다.
만리장성에 맹강녀의 전설이 있다면 대국산성에는 청 장군의 전설이 있다.

옛날 옛날 한 옛날, 대국산 아래 비란리라는 마을에 명과 청이라는 의좋은 형과 아우가 살았다. 또한 같은 마을에 달님처럼 예쁜 한 낭자가 살았다.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지 명과 청 형제가 똑같이 낭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낭자 또한 두 형제를 사랑했다. 낭자로 인해 형과 아우는 점점 그 사이가 멀어졌다.
어느 날 형이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러니 내기를 해서 지는 쪽이 포기하는 거야.”
낭자가 두루마기 한 벌을 꾸미는 동안에 한 사람은 30관이나 되는 쇳덩이를 발에 묶어 20리나 되는 읍내를 갔다 오고, 한 사람은 대국산에 올라가서 돌로 산성을 쌓는 것이 내기였다. 이기는 사람이 그 두루마기를 입고 낭자와 결혼을 하고, 지는 사람은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명은 쇳덩이를 택했고, 청은 성 쌓기를 택했다.
달밤에 낭자가 두루마기를 짓는 가운데, 명은 읍내로 가고 청은 대국산으로 갔다. 달이 서산에 걸리고 두루마기 짓기가 끝나갈 무렵 헐레벌떡 한 사람이 먼저 달려왔다. 청이었다. 한 발 늦은 명은 운명이라 생각하고는 칼로 가슴을 찌르고 죽었다. 그 뒤 왜구들이 쳐들어왔다. 청 장군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대국산성으로 들어갔다. 왜구가 성을 깨고 화살을 쐈지만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청 장군은 용맹하게 싸워 왜구를 물리쳤다.

형제가 왜 싸웠을까? 의좋은 형제가 한 여자를 두고 왜 싸웠을까? 예와 의를 목숨처럼 숭상하는 배달겨레의 형제가 왜 목숨을 걸고 실없는 내기를 걸었을까?_128~129쪽

* 장량상의 동정 마애비
장량상이 동정시東征詩를 적었다 하여 동정이란 이름이 붙고, 바위를 깎아 글을 새겨 넣었다 하여 마애비라 한다. 이 마애비는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 명나라 유격대장 장량상이 새긴 비석이다. 명나라가 조선을 구하고 수군 제독 진린이 왜적을 무찌른 공적을 기린 글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 선소에는 왜성이 있었다. 지금도 그 왜성의 흔적이 마애비 언덕 위에 남아 있다. 왜구는 선소 언덕 위에 성을 쌓고 제 마음대로 ‘남해성’이라 이름 붙였다. 성을 쌓은 왜의 장수 이름이 종의지였다. 임진왜란의 막바지, 1598년 동짓달 열여드레와 열아흐레, 이틀에 걸쳐 관음포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종의지는 왜성의 군사를 이끌고 소서행장을 지원하러 노량으로 갔다. 그러나 종의지의 왜군은 맥을 쓰지 못하고 관음포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이 가칭이 고개를 넘어 이곳 선소로 도망을 쳐왔다.
1598년 노량해전 직후, 장량상이 군함을 몰아 선소로 들이쳤다. 선소에 남아 있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장량상이 선소에 들른 까닭이었다. 그러나 장량상이 도착했을 때 선소는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가칭이 언덕을 죽기 살기로 넘어온 패잔 왜구는 선소에 도착하자마자 배를 몰아 부산포로 줄행랑을 놓았을 것이니. 그러니 선소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장량상은 한동안 선소에 머물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큰 바위를 보고 동정시를 적게 되었던 것이리라._155~156쪽

* 남해 향교
김만중이 귀양살이할 때 이 남해향교에서 《주자어류》 전질을 빌려다 읽었다. 날마다 완독했다가 뒤에 그 요점을 정리하여 《주자찬요》라는 책을 엮었다는 기록이 《서포연보》에 전한다. 옛날 향교는 공립도서관 역할까지 한 것이다.
명륜당을 나와 대성전을 한 바퀴 돌고 동재에서 서재를 보면서 밖으로 나왔다. 유가는 차림새를 중요하게 여긴다. 불가나 도가와는 달리 유가는 형식을 중요시한다. 곧 유가는 형식주의다. 〈예기禮記〉에 “울음에도 법도가 있다”고 했다.
지리산 산천재의 남명이 평소 검소했다. 하루는 거친 베옷에 꾸미지 않은 말을 타고 들에 나갔다. 장사꾼과 서로 길을 비키라고 다투다가 장사꾼이 남명을 밀어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 욕지거리를 하고 갔다.
“사군자士君子가 옷차림이 허술하니 장사하는 놈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
그 뒤부터는 화려한 옷과 말에 수행 종까지 화려한 치장을 했다.
“사군자는 외모 꾸미기에 응당 이와 같이 하여야 하느니.”
그 뒤 진주 인근의 양반들 사회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_204~205쪽

* 백이정 난곡사
백이정은 남해군 난포로 귀양을 왔다. 난포는 신라시대에는 전야산군 난포현이었고, 지금은 난음이다. 개경으로부터 2,000리 길, 유배 2,000리면 중죄인이다. 무슨 큰 죄를 지었을까?
그냥 은둔한 것은 아닐까? 유배가 아니라 난포에 은둔한 것은 아닐까? 굳이 유배가 아니더라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싶었을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내쫓고 아비가 자식을 내치는 더러운 세상,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싸움을 붙이는 개판 세상, 무슨 미련이 있었겠는가. 그런 세상을 그는 등지고 싶었을 것이다.

정승의 무덤을 자손들이 지키며 슬퍼해 한다. 남해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남해인이라 하였다.

난곡사 상량문에 적혀 있는 글이다. 백이정이 노년을 난포에서 보냈고, 난포에서 죽었다는 기록이다. 또한 남해 백씨의 시조가 되었고,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한동안 살았다는 기록이다. 귀양이든 은둔이든 다를 게 없다. 백이정은 그저 남해에서 살다가 죽었다.
머나먼 섬나라 남해, 개경 사람이 살기엔 외로운 곳이지만 세상을 등진 사람이 살기엔 풍요로운 곳, 권세와 부귀영화도 멀어졌지만 음모와 권모술수도 멀어진 곳이 이 섬나라 남해였다. 백이정은 일흔일곱 천수를 누리고 난포에서 죽었다._232쪽

* 용문사 벽장 속에 잠든 삼혈포
삼혈포가 왜 박물관으로 가지 않고 벽장 속에 있을까? 구멍이 셋 달린 화승총이라면 단혈포에서 육혈포로 가는 중간 단계에 있는 총이다.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최신식 무기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파란 눈의 장사꾼이 가져온 단혈포를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끝에 성능이 탁월한 조총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내쳐 삼혈포까지 만든 것일까? 아니면 왜구가 남기고 간 조총을 보고 조선의 철물 장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일까? 아무튼 삼혈포는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박물관에서 뭇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야 한다.
배에서 꼴꼴 소리가 났다. 물 맞은 병아리 꼴로 마을로 내려갔지만 마을에서도 내가 잘 곳은 없었다. 해거름, 비가 가끔씩 떨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처량하게 만들었다. 길가 소나무밭에 쪼그려 앉아 지도를 폈다. 월포에 파라솔 그림이 있다. 파라솔 그림이면, 먹고 잘 곳이 있다는 말이다. 급히 페달을 밟으나 자전거는 나아가지 않는다._245쪽

* 백 정승의 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무덤이 예사로운 무덤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자연석으로 네모난 무덤을 크게 쌓고 그 무덤 둘레에 또 네모난 석축을 쌓아 무덤을 둘러쳤다.
어느 시대 무덤일까? 가야시대의 무덤은 아니다. 가야시대의 무덤은 높은 언덕이나 야산 꼭대기에 땡긋하게 흙으로 무덤을 쌓았으며 봉분이 몹시 크다. 경남 함안이나 창녕에 가면 허다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리산 자락 산청에 가면 구형왕릉이 있다. 언덕 비탈에 자연석만으로 층층이 쌓은 매우 큰 돌무덤이다. 여기 무덤은 이도 저도 아니다.
경주에서 본 신라시대의 무덤도 아니다. 이 무덤의 봉분은 신라 왕릉의 봉분에 비해 훨씬 작고 가야의 봉분보다도 작다. 조선시대의 무덤도 아니다. 조선시대의 무덤은 봉분이 매우 작고 돌을 적게 쓰는 것이 특색이다. 세조 임금이 ‘돌 많이 쓰지 말라, 농사일도 바쁜데…’ 해서 그게 법이 되었다. 현대인들이 쓰고 있는 무덤은 조선시대를 계승한 것이다.
이렇게 제하고 나니 남는 것은 고려시대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려시대 사람이요, 고려시대 사람 가운데서도 신분이 매우 높았던 사람일 것이다. 문외한인 내 판단이다._263쪽

* 가천 암수바위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았다. 소문난 가천 암수바위다. 쭉 뻗어 오른 위용은 뭇 사람들을 압도한다.
암수바위라면 짝이 있다. 그 짝이 되는 바위가 언덕에 엇비스듬히 누웠다. 갸름한 머리에 퉁퉁한 몸매, 마치 사람이 언덕에 누워 있는 듯하다. 하늘 향해 비스듬히 선 바위를 숫바위라 부르고 언덕에 기대어 누운 바위를 암바위라 불러, 사람들은 두 바위를 가천 암수바위로 짝을 맺어주었다.
내가 감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다녀갔다.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싱글벙글하고, 어떤 사람은 넋을 빼고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어떤 사람은 탄식을 한다.
이 암수바위의 점잖은 이름은 ‘미륵바위’다. 예부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은 절에 가서 미륵부처에게 빌었는데, 이 암수바위에 빌다보니 점잖은 이름이 이 바위로 옮겨져 미륵바위가 된 것이다._280쪽

* ‘노자묵고 할배’의 섬, 노도
다음 날 아침을 먹자마자 민박집을 다시 나섰다. 늦게 나가면 하늘 또한 적군이 되기 때문이다. 장비도 보완했다. 어제 다리를 찍은 낫에다가 지게 작대기를 더했다. 초장부터 과감하게 치고 들어갔다. 이 밭 저 밭을 베고 두들겼다. 비석이 있어 표가 난다고 하던데…. 그러나 비석도 집터도 보이지 않았다.
걱정했던 땡볕이 나타나면서 나는 낫과 작대기를 집어던지고 항복했다. 나무 그늘에 퍼져 앉았다. 도대체 어느 구석에 비석을 감추고 있을까? … 드디어 작은 비석이 하나 드러났다.
돌비석, 300여 년 전 한 노인이 귀양살이하던 곳이다. 그 넓이가 열 평을 채 넘지 못한다. 그것뿐이었다. 조선시대 소설가, 여기서 3년 귀양 살고 비석 하나로 남았다. 한양 한 세도가의 한평생 영화와 몰락이 여기 한 개의 돌덩이로 남았다. 이틀에 걸쳐 그토록 헤매었던 것은 한 개의 돌멩이였다. 나는 돌멩이를 한 번 만져보고는 우물가 동백 그늘로 들어갔다(근래 김만중 초당이 복원되었다)._301~305쪽

*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위해 지은 〈구운몽〉
서포는 효자였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는 분사했고, 할머니는 자결했다. 어머니 또한 자결하고자 했으나 다섯 살 난 아들(김만기)과 배 속의 아이(김만중)를 위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포의 어머니는 글을 좋아하고 뛰어난 사람들의 언행 배우기를 즐겼다. 평생 옷을 소박하게 입었으며 즐거운 모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자식이 공부에 게으르거나 나쁜 짓을 하면 사정없이 매를 들었다. 훗날 두 아들이 출세를 했어도 항상 검소했으며 허영을 부리지 않았다. 신사임당이 어질고 부드러운 어머니 상이라면 서포의 어머니는 엄격하고 강인한 어머니 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서포의 효성은 지극
했고 정적들까지 감동할 정도였다. … 서포는 편지로 자주 문안 인사를 드렸다. 《서포연보》에 “글을 지어 부쳐서 윤 부인(김만중의 어머니)의 소일거리로 삼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 글은 아마 〈구운몽〉일 것이다. 이즈음 서포는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_331~335쪽

* 미륵이 돕는 마을, 미조항
긴긴 여름 해가 떨어질 무렵, 미조항으로 내려가는 언덕에 섰다. 미조彌助, 미륵이 돕다. 왜구의 수난에서 비롯된 지명이리라. 뒷산에는 숲이 우거지고, 앞에는 둥글게 포물선을 그린 땅끝이 미조를 감싸 안았다. 큰섬, 작은섬, 범섬, 노루섬이 바다 앞을 둘러섰다.
아, 아름다운 미조! 하려는 순간, 머뭇거려진다.
그것은 너무나 습관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이다.
한려수도 항구치고 이만큼 아름답지 않은 항구가 어디 있으랴.
높고 낮은 건축물들이 엇박자다.
미조의 산수와 인공의 구조물들, 부조화다.
척박한 베네치아가 관광의 명소가 된 것은 오로지 건축물 덕택이다. 시드니가 미항이 된 것 또한 인공의 미 덕택이다. 한려수도가 북유럽의 피요르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부조화, 건축물이 문제다. 건축물의 모양, 스카이라인, 색깔이 2퍼센트가 아닌 20퍼센트 부족이다. … 조선시대 미조항은 남해에서 가장 큰 해군기지였다. 동쪽으로 거제가 보이고, 북쪽으로 삼천포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전라좌수영(여수)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리고 뒤에는 높은 산이 버티고, 앞은 야산이 둥글게 막고 있어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 항구다. 미조항은 왜구가 지나가는 길목이고, 왜구를 때려잡는 수군기지였다. 수군기지의 우두머리는 수군첨절제사, 줄여서 첨사다. 미조항은 조선시대 종5품 미조 첨사가 왜구를 지켰던 역사 속의 항구다._368-369쪽

* 물건 어부방조림
고개를 넘어서니 ‘물건勿巾’이다. 물건이라는 이름은 동네 모양이 한자와 유사하여 붙였다고 한다. 아래로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안선을 따라 초록의 띠가 길게 펼쳐졌다. 나는 브레이크를 삑삑 잡아가면서 내리막을 슬슬 내려갔다.
이 숲은 1959년에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된 ‘어부방조림魚付防潮林’이다. 1만여 그루의 나무가 해안선을 따라 1.5킬로미터에 걸쳐 초승달을 이루고 있다. 다산 기슭에 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 논이 있고, 논 앞에 수풀이 있고, 수풀 앞에 둥근 해안선을 따라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숲이 고기를 끌어 모은다 하여 ‘어부림’이고, 숲이 논과 마을을 파도와 해일로부터 막아준다고 하여 ‘방조림’이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로 힘차게 솟았다. 나이가 300살도 더 먹은 어른이시다. 간간히 고목나무도 있고 어린 나무도 있다. 할아버지나무, 아들나무, 손자나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스스로 자손을 퍼뜨려 사람이 심지 않아도 대를 거듭하고 있다.
안내판을 보니 이런 나무도 있나 싶다. 누리장나무, 가마귀베개나무, 길마가지나무, 가마귀밥여름나무, 윤노리나무, 푸조나무, 말채나무, 나무도 아름답고 이름도 아름답다._388-389쪽

* 군자식 고기잡이, 죽방렴
다리 가운데 서니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쫘르르, 물 감기는 소리다. 죽방렴에서 나는 소리다. 물이 죽방렴의 말뚝에 부딪히니 허연 거품이 일어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죽방렴이 아주 가까이에 보인다. 아까 청년이 말한 통발 문짝도 잘 보였다. 지금은 물살에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물이 번쩍거린다. 아래쪽으로 죽방렴이 몇 개 더 보인다. 이 죽방렴은 관광용으로 만들어놓은 모조품이 아니다. 저 말뚝이 어제오늘 박힌 것도 아니다. 남해 관광 안내지에 ‘원시어업 죽방렴’이라고 이 희한하게 생긴 장치를 소개하고 있다. 이름처럼 원시시대부터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죽방렴은 손 안 대고 코 풀기로 고기를 잡는다. 어부는 물때에 맞추어 배를 타고 가서 통발에 든 고기를 건져 오기만 하면 된다. 썰물과 밀물이 교차되는 시간이 물때가 된다. 썰물 밀물의 물갈이가 하루에 두 번이니, 하루에 두 번 수확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러니 현대식 배가 생기고 현대식 그물이 생겨도 남해 지족 사람들은 죽방렴을 버리지 못한다. … 우리 배달겨레식 고기잡이는 죽방렴이다. 죽방렴의 매력은 인간다움에 있다. 부채살처럼 말뚝을 박아 물 위에 척 벌려 놓는다. 걸려들 놈만 걸려들어라. 물 따라 흘러가되 오른쪽으로 가는 놈은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는 놈은 왼쪽으로 가거라. 이도 저도 아닌 놈만 걸려라. 통발 안도 성기다. 날씬한 놈, 욕심 없는 놈은 빠져나가라. 똥똥한 놈, 욕심 많은 놈만 걸려라. 마음이 어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죽방렴은 이른바 군자식 고기잡이 방법이다._411~412쪽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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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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