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차이가 약칭인 상하이 요리는 간장이나 설탕으로 달콤한 맛을 낸 기름기 많고 진한 것이 특징이다. 쌀 생산지라 쌀밤에 어울리는 요리가 발달한 점도 상하이 요리 특징의 하나로 양쯔 강 유역을 대표한다. 상하이는 예전부터 중국 제일의 항구로서 외국과의 왕래가 빈번했고, 또 양쯔 강과 바다가 가까운 지역이라 해산물이 풍부해서 맛있고 독특한 해산물 요리가 많다.
상하이 요리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으로는 상하이 민물게 요리가 있다. 음력 9월 초에서 섣달 말이 제철인데 그중에서도 캄캄한 그믐밤에 잡는 암놈을 치고로 친다. 달 밝은 보름께에는 게들이 밝은 달빛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스트레스를 받아 수척해지기 때문이란다.
고급 식당에서 음력 9월 그믐께 잡은 최상등품 암게 한 마리 맛을 보려면 한국 돈으로 최소한 5만 원 이상은 들어야 한다. 제철이 지난 게는 오래 묵은 술에 담가 쥐시에를 만드는데, 술안주로도 일품이다. 또 베어먹으면 입 속에 하나 가득 퍼지는 뜨거운 수프가 들어 있는 고기만두 샤오롱빠오도 유명하다. 이밖에 산위라는 뱀장어, 뱀, 미꾸라지를 1/3씩 골고루 닮은 놈(한국에는 정력에 좋다 해서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일찌감치 멸종되었다 함)을 갖은 양념에 볶은 요리 챠오산위나, 호수에서 잡히는 작은 새우회, 한즈라는 피조개 비슷한 조개의 반숙, 맛조개 볶음 등 맛있는 요리가 많다. 그러나 상하이 바깥지역 사람들은 상하이 요리를 제대로 된 중국요리로 치지 않는다. 상하이 요리는 앞서의 베이징 요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요리 4강은 물론 8강에도 들지 못한다. 그런데 상하이 사람이 집필하거나 외국인이 출판한 책에는 상하이 요리를 4대요리로 둔갑시켜 놓고 있다.
--- pp.113-114
중국은 동성은 있어도 동본은 없다. 자연히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는 혼인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더욱 있을 수 없다. 과거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하면서도 결혼할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목숨을 버렸던 동성동본 금혼을 규정한 우리 나라의 민법 제809조 같은 것은 옛날 중국이나 지금의 중국에나 있을 수 없었고 있었던 적도 없었다.
그런데 동성동본 찬반여부를 떠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개 그 제도가 공자의 유교사상의 고조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한국에서 실시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동성동본이라는 말 자체가 없는 중국에서, 공자는 물론 중국인 누가, 언제, 어디서 동성동본은 결혼하면 안 된다고 했던가. 엄밀히 따지고 보면 옛날 중국에는 인척간의 금혼조항 등 결혼을 제약하는 율령이나 관습법이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불특정다수인에 대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금지조항이 아니라 기껏해야 부모혈족 12촌 내에 친족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등의 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청나라가 망하자 함께 폐지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지가 벌써 90년이 다 된다. 덧붙이건대 공자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멋대로 왜곡하거나 교조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운용하려다 망한 것이다. 너의 탓도, 그의 탓도, 그들 탓도 아니다. 바로 내 탓이요, 우리 탓이다.
--- pp.270-271
중국말로 '셩이'는 장사나 영업을 뜻한다. 셩이는 인생의 의의, 즉 왜 사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 따위의 심오한 형이상항적 의미가 아니다. 중국인에게 '삶의 뜻'은 한마디로 장사를 잘해, 잘먹고 잘사는 현실적 이이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인이나 상업이란 말도 원래 商나라에서 왔다. 무왕이 상의 주왕을 토벌하자 천하는 주가 되었다.
나라 잃은 상나라 사람은 설 땅이 없어져 장돌뱅이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상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백인종.흑인종.황인종. 이제 인종을 피부색으로 분류하는 것은 말 그대로 표피적이다. 중국인은 백인종도 흑인종도 아니다. 중국인은 황인종이기보다는 상인종이다. 그렇다. '중국인은 상인종'. 그렇게 해야 피부색을 꿰뚫고 그들의 본질에 좀더 접근할 수 있다.
--- p.72
장성을 올라보지 못한 자는 사나이가 아니지 (不到長成非好漢).
-마오 쩌둥
그러나 장성을 오르기만 하면 졸장부도 금방 사내대장부가 되는 걸까? 장성을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사람의 수가 올라본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언뜻 들으면 말 같지도 시(詩)답지도 않은 소리를, 만리장성 홍보원이나 관광안내원이나 할 소리를 어째서 마오 쩌둥은 평소 그답지 않게 함부로 하였을까? 깊은 사색과 오랜 답사를 끝마친 끝에, 북경원인은 아래와 같은 대구를 지었으니 이를 마오 주석과 중국인들에게 삼가 헌정하는 바이다.
장성에 올라서도 한쪽 면만 본다면, 사나이가 아니지 (到長城只看一面非好漢).
-북경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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