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이런 감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카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린데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깨져버린 꿈을 안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훨씬 쉬었다. 하지만 매사에 쉽기만 한 일은 없었다. 죽음도, 삶도.
--- p.131
마크 체스테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경찰이었다. 그는 작고 단편적인 정보으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꿰어 맞추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마크의 본능은 항상 어떤 목표를 향하고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웬일인지 몇가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여자를 제대로 봤더라면, 아마 지금쯤 그의 친절한 배려와 듬직한 태도에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을 텐데....
그러나 여자는 내면 속으로 점점 더 파고드는 편인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여자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만들려면 마크는 여자가 평생시에도 가지고 있을 경계심을 누구러뜨려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에게서 느꼈을 부정적인 인상과 냉정한 태도에 대한 반감마저도 사라지게 해야했다.그러나 지금 마크는 카렌 위틀로를 원했고 그 마음은 여자를 한 번 쳐다볼 때마다, 여자가 숨을 쉴 때마다 정도가 더해져 갔다. 이 여자는 좀 특별했다.
--- p.105
그의 짙은 눈썹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체스테인 형사는 흘끗 카렌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카렌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지만 형사의 말하는 투로 보아서 욕설을 내뱉고 있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드디어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치고 수화기를 쾅 내려놓은 체스테인 형사가 카렌을 돌아다보았다.
'프랑스어 모르시죠?'
'몰라요.'
'다행입니다. 전 어느나라 말이든 욕이란 욕은 다 압니다. 그거면 충분하거든요.'
체스테인 형사는 아직도 분이 안 플린듯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면 콜라?'
'생각없어요. 아침식사를 하고 나왔으니까 오늘은 사무실에서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억지로 음료수 먹이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우리 경찰의 좌우명은 '봉사와 보호'입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눈가에 매달린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며 체스테인 형사가 책상위에 놓인 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중 략 -
카렌은 다시 몸을 떨었다. 한번 떨리기 시작한 몸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추위 때문일까?, 슬픔 때문일까? 카렌도 분간할 수 없었다. 몸안에서부터 밖으로 번져나온 이 떨림은 아무리 이를 악물고 멈추려해도 멈추어지지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져나올것만 같은 울음을 막아보려고 카렌은 숨조차 멈추었다. 체스테인 형사가 말없이 카렌의 등뒤에 서서 자기몸으로 바람과 비를 막아주었다. 카렌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고 형사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카렌은 등에 와 닿는 그의 강하고 듬직하고 따뜻한 가슴팍을 느낄수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것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체스테인 형사는 한 쪽 옷자락을 펼쳐 마치 날개로 새끼를 감싸는 어미새처럼 그녀를 감싸주었다. 형사의 옷자락은 카렌의 어깨와 맨살이 드러나있는 팔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왠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카렌을 감싸안은 채 체스테인 형사는 아무말없이 그녀를 지켜주었다.
--- p.128-129, 141
'그냥 '좋아요' 그뿐이야?'
마크가 카렌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사랑하는 것 같아? 아직도 확실히 모르겠다는 거야?'
'사랑해요. 확실히'
마크가 카렌을 흘겨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렌도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 p.304
검시관인 닥터 파가나스가 비디오 테이프를 VTR에 밀어 넣었고, 카렌이 작은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는 동안, 마크는 그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카렌의 옆얼굴은 부드럽고 윤곽이 뚜렷한 아주 여성적인 얼굴이었다. 옆에서 보니 카렌의 부드러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크는 약간 뒤로 물러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살인용의자를 관찰하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분석했다.
닥퍼 파가나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렌에게 비디오의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수십 번도 넘게 유족들의 시신 확인 절차를 도와온 마크로서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카렌 위틀로는 어깨를 똑바로 세우고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됐어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지도, 선생님이니 박사님이니 하며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마크는 다시 한 번 카렌 위틀로에 대해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여자가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응급실 간호사라면 천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잠자리에서의 이 여자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마크도 직업상 부상이 잦아 두 번이나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pp.1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