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엄마들은 다 아이를 수월하게 키우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하고 자책하며 괴로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않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 육아를 식은 죽 먹기로, 100퍼센트 완벽하게 해내는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는 이유는 엄마로서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만큼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녹록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완벽한 엄마가 되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강박증도 내려놓을 수 있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힘들다. 모성본능과는 별개로 육아는 아이와 직접 맞닥트리는 실전이다. 수많은 육아책을 섭렵해서 다양한 육아법에 통달한 엄마라 할지라도 수시로 나타나는 아이의 돌발 행동에 대한 정답을 바로바로 내놓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완벽한 엄마가 되겠다는 욕심, 내 아이를 최고로 키우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실수와 경험을 통해 배우면서 차츰 진짜 엄마가 되어가겠다는 마음으로 육아에 임해야 한다. 아이가 나를 키우고, 아이와 함께 나도 자라간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워야 한다.
--- p.26,「아이와 함께 자라가는 것이 육아다」 중에서
많은 워킹맘들이 좋은 엄마,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사실 아이가 없을 때도 지친 몸을 이끌고 직장에서 돌아와 집안일까지 하려면 힘들 수밖에 없다. 거기다 아이가 생기면 육아의 임무까지 더해져 혼자서 세 사람의 몫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자체가 무리이고 욕심이다.
‘좋은 엄마 콤플렉스’에 빠지면 육아는 오히려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 엄마가 지치면 아이에게는 역효과를 낳기 십상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리고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엄마가 육아를 힘들어하고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한다면 아이의 가슴속에는 죄책감이 쌓인다. 그러면 은연중에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다. 이런 결과를 바라는 엄마는 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
워킹맘의 진짜 ‘적’은 아이와 함께할 수 없게 만드는 직장일이 아니다. 일, 육아, 살림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슈퍼맘 콤플렉스’다. 죄책감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엄마인 당신 스스로 만들고, 키우고, 느끼는 것이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나쁜 엄마라고 단죄할 수 없다. 설령 그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일이 대응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말고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엄마는 단 한 명도 없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부족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꾸 격려해주고 건강한 자존감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죄책감에 발목 잡혀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 당당해져라. 죄책감 따위는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아이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한 시간으로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라.
--- pp.54-55,「죄책감이 육아를 망친다」중에서
아이가 엄마를 향해 말을 할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에게 뒷모습만 보여주며 “응 말해. 듣고 있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듯 아이의 말에도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엄마의 사랑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온몸으로 들어주기를 원한다. 말 그대로 경청傾聽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이 말에 귀 기울여 온몸으로 듣기’, 즉 경청에 관한 묘사로는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가 단연 압권이다. 1982년에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어 그 해에만 570만 부가 팔려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창가의 토토』에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댁의 따님은 수업 중에 책상 뚜껑을 백 번도 더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어째 조용하다 싶으면 이번에는 창가에 서 있는 거예요…….”
워낙 주의가 산만하고 독특한 아이였던 주인공 토토는 처음 입학한 초등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다(사려 깊은 엄마의 배려로 토토는 자신이 당시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이후 엄마의 손을 잡고 재입학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고물이 된 전철 여섯 량을 연결해 교실로 쓰는 도모에 학원으로, 일종의 대안학교였다. 이곳에서 토토는 자신의 평생 은인인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을 만난다. 다음의 내용은 토토가 도모에 학원에 간 첫날 교장실에서 소사쿠 교장 선생님과 마주앉아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다.
그때, 토토는 왠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자기 얘기를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하품을 하거나 지루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토토가 얘기하는 내내 똑같이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열심히 들어주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얘기하는 동안 하품을 하거나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는 것, 상대방이 얘기하는 내내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열심히 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경청’이다. 소사쿠 교장 선생님은 다른 학교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며 퇴학시킨 아이 토토를 진정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었을 뿐 아니라 네 시간 동안이나 그 아이가 하는 (두서없는) 얘기를 진정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었던 것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일에 쫓겨 아이들의 얘기를 건성으로 듣게 될 때마다 마치 죽비처럼 『창가의 토토』의 이 장면이 떠올라 스스로를 꾸짖곤 한다.
--- pp.103-105,「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성공한 인생을 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