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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버리면 그대가 손해

날 버리면 그대가 손해

이형순 | 도모 | 2015년 04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9 리뷰 2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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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4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78g | 148*210*20mm
ISBN13 9788997995233
ISBN10 899799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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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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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들려요”
한 여자가 뒤주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폴더 폰처럼 엉거주춤 허리를 꺾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화성행궁에 관람을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주 속을 들여다본다. 그녀처럼 250 여 년 전의 비명 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기에게 한 얘기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저 말인가요”
그녀는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뙤약볕은 그녀와 나를 태워 죽일 것처럼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처음 본 그녀에게 기시감 旣視感 이 느껴졌다. 언젠가 말을 나누었고, 또 오래전에 지긋지긋하게 싸웠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햇볕에 물든 그녀는 칙칙한 뒤주와 잘 어울렸다. 그대로 뒤주에 새겨져도 좋을 그림이었다.
“들어가 보실래요”
--- p.8

홍살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저만치서 휴대폰을 돌려주려고 오는 그녀가 보였다. 그런데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소나기가 맹렬하게 뒤쫓아 왔다. 순식간이었다. 마른 땅을 적시며 흙먼지를 일으키는 소나기의 기세는 수십만 대군이 쏜살같이 말을 달리는 형국
이었다. 그녀가 뛰었다. 그녀가 소나기를 몰고 오고 있었다. 몇 걸음 뛰지 않아, 소나기가 그녀의 머리를 덮쳤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머리 위에 우산처럼 받치고, 삐치기 좋아하는 초등학생처럼 한쪽 눈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나와의 거리를 좁히느라 터덜터덜 뛰고 걷기를 반복했다. 나는 느린 화면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소나기 속의 그녀는 싱싱한 소나기였다. 닮았다. 청바지에 자주색 면티를 입은 그녀가 뛸 때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기세 좋은 소나기는 여우비였다. 비가 오는 중에도 햇살은 여전히 빛났다. 햇살에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이었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손바닥 우산을 쓰고, 소나기 젖은 햇살에 반사된 갈색의 머리카락을 나풀대며, 나의 휴대폰을 찾아주기 위해 애를 쓰고 뛰어오는 한 여자의 스케치 풍경.
--- p.13

님포마니아. 순진해서 요염하고 귀여운 님프들은 신과 인간을 설레게 했다. 소녀 같은 그녀들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거친 성격과 외모의 사티로스와도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을 함부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천진한 그녀들의 사랑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니까.
신과 인간들이 욕망하는 발랄한 순수 요정들은 섹스 중독증 환자들의 진단명에 이름을 빼앗겼다. 하지만 님프가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님프들은 신과 인간들 주위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허기진 욕망을 품게 하는, 색정광을 양산하는 숙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님프
가 있는 한,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는 님프를 쫓는 게걸스러운 짐승일수밖에 없다.
--- p.36

돌아가야겠다. 집으로…. 늘 가려고 했던 길.
나는 시동을 걸었다. 해인이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해인이 보조석에 앉았다. 우리는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도로를 달렸다.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목 앞에 멈춰 섰다.
“내려요. 미안했어요.”
내 말에 해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어서 내려요. 들어가요.”
해인은 여전히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 갈 건데요”
해인이 물었다.
“집으로… 갈 거예요.”
해인은 나의 말을 듣고도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
“잘 가요.”
해인이 말했다.
--- p.201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뀐 눈발이 길을 완전히 점령했다. 폭설이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진눈깨비로 덮인 도로도 얼어붙을 것이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해인이었다.
“나 안 태우고 가면… 평생 당신 안 볼 거야!”
단호한 해인의 목소리였다.
“…….”
“당신 차 돌려.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나는 오른발에 힘을 주어 액셀레이터를 더욱 강하게 밟았다.
“당장 세우라고! 당신 잊었어? 나한테 한 말? 너무 힘들 때면 의자에 가만히 앉으라며! 그럼 선재 씨가 나에게 온다고 했잖아! 그 말 벌써 잊었어? 나… 지금 당신 옆에 앉을 거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차를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함박눈은 거침없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위에서 아래로….
--- p.202 -

내 옆에는 해인이 앉아 있다. 다시 한 번 해인의 모습을 내 두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아름다운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설렐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 사랑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람… 나의 집까지 함께 길을 걸어주고 있는 사람…
고맙다… 벼랑 같던 내 사랑… 위태했던 내 눈먼 사랑아….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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