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불목하니들을 만나기 위해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오가는 길에 한두 장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고 수년이 흘렀다. 어느새 내가 하는 작업의 주인공이 자연스레 어머니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렇게 어머니와 나의 소요逍遙가 시작됐다.
2003년부터였으니 벌써 햇수로 십 년이 지났고 그동안 함께 다닌 절과 절터가 사백여 곳에 이르렀다. (…) 꽃이 만발한 봄에는 한 달에 이십여 일을 객지에서 보냈으며, 단풍이 고울 때는 쉬지 않고 칠박 팔일을 여행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그렇게 다닌 거리가 자동차로만 이십만 킬로미터. 서울에서 부산을 이백 번 왕복한 거리이고, 지구를 다섯 바퀴나 돈 셈이다.
(…) 부처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주치는 아름다운 풍경 또한 부처다.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도 보살의 마음이고, 경치를 보고 예쁘다 느끼는 것 또한 보살의 마음이다. 때문에 이 책은 어머니와 돌아다닌 절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본문에는 사찰 사진이 그리 많지 않다. 주로 절로 가는 길에서 만난 자연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 자연 속에 어머니를 함께 담아내는 것은 내게는 커다란 행복이었다. 산도 들도, 강도 바다도, 꽃과 나무도, 바람도 안개도, 자연은 그때그때 색다른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홀로일 때도 아름답지만, 서로 어울릴 때면 더욱 아름답다. 그런 풍경 속에 나의 어머니까지 함께 어우러지니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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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당신 몸 아픈 것은 생각지도 않고 혹시 그 때문에 내가 일을 못 하게 될까 더 걱정이었나 보다. 그냥 됐다고, 경주까지 왔으니 한번 들려보려 했던 것이지 오어사에 꼭 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쉬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분황사를 나와 황룡사 터를 거닐었다. 아침 대왕암에서의 여명과 같이 노을이 화려했다. 해가 다 지고 나서도 한참을 머물다가 옛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조선시대 정관일鄭寬一이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성품이 매우 착해 부모를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멀리 장사를 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안부 편지를 한 통 보냈다. 편지에는 편안히 잘 있다고 적혀 있었으나 정관일은 그 편지를 품에 안고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아버지께서 병을 앓고 계신가 봅니다. 글자의 획이 떨렸지 않습니까?”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니 그때 병이 위독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어젯밤부터 어머니는 기운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왜 그것을 진즉에 알아채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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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욕실에는 언제나 수건이 두 개 걸려 있다. 하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쓰는 것이고 한쪽 곁에 걸려 있는 수건은 내 것이다. (…) 수건을 따로 쓰게 된 계기는 지난 2000년에 내가 혹독한 피부병을 앓고 난 뒤부터다. 병이 다 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건을 따로 쓰고 있다. 그러나 위생적이기는 하지만 왠지 서글퍼진다. 부모님은 내 병이 당신들께 옮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이 먹어 가는 당신들을 통해 내게 나쁜 병을 옮기지 않을까 싶어 그리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밥을 씹어 내게 건네줬고 모든 음식을 어머니가 먹던 것으로 내가 먹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어머니와 나 사이에 변한 것은 없는데 오직 바뀐 것이라고는 어머니의 행동뿐이다. 같은 숟가락을 쓰지 않고 수건을 따로 쓰며 먹던 것을 나누지 않으려 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어머니는 당신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였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행동이 변했다고 마음마저 변했겠는가. 어렸을 적에는 뜨거운 것을 먹고 입을 데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체하지 않게 하려는 보살핌으로 밥을 씹어 넣어 주는 것이고, 커서는 당신으로 인해 행여나 나쁜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니 어찌 어머니가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p.92
어머니는 그런 걱정도 잠시, 눕자마자 코를 골며 주무셨다. 집에서는 서로 다른 방에서 자기 때문에 살필 수 없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함께하면 한 번씩 어머니 얼굴을 바라본다. 객지여서일까? 민얼굴과 손발을 보니 유난히 주름이 깊고 쪼글쪼글해 보였다. 내 나이 먹는 것은 생각지 않고, 늘 엄마였던 여인이 언제 이렇게 할머니가 됐나 싶었다. 반쯤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이는 대부분 빠져 있고 머리맡에는 틀니 통이 놓여 있다. 바느질하랴 연밥으로 염주 만들랴 거죽만 남은 손은 상처투성이고, 주방 일을 하면서 간혹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한 흔적이 발등에 멍으로 남아 있다. 관심 갖고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삶의 흔적들이 몸 곳곳에 있었다.
언젠가 저녁 반찬으로 데친 오징어가 나왔는데 채를 썬 듯 아주 얇고 잘았다. 몇 개씩 집어 떨어뜨리지 않고 먹으려니 아주 번거로웠다.
“아니, 오징어를 왜 이렇게 잘게 썰었어?” 투정을 부렸더니, “너는 이가 튼튼해서 괜찮겠지만 우리는 이가 부실해서 이렇게 해야 먹는다.”
아차 싶었다. 이유 없는 행동이란 없다. 돌이켜 생각하니 어머니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말수가 없어지면 뭔가 근심거리가 생긴 것이고, 드시는 밥이나 주전부리의 양이 줄어들면 속이 불편한 거다. 볕이 좋을 때면 아파트 공원에 나가 또래 친구분들과 어울리다 오셨는데, 어느 날부터 나가지 않기에 여쭤봤더니 그분들과 언짢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별것 아닌 일에 짜증을 내고 낮에도 누워 있는 경우가 많으면 십중팔구 몸살이 난 게 분명하다.
--- p.99
일주일 뒤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염불암에 도착하니 그제야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새벽부터 준비해온 김밥으로 아침을 먹고 나는 맞은편 산으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보니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어머니가 따사로운 햇볕 아래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나는 무척이나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어머니는 일을 다니셨는데 어린 아들 둘이 늘 신경 쓰였을 것이다. 형은 먼 곳까지 가서 놀다 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친구들과 놀더라도 집 앞을 떠난 적이 없었다.
혹시나 길을 잃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 근처를 벗어나지 말라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대문 앞에서 퇴근하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와는 다른 기다림이지만 세월이 흘러 이젠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벌써 십여 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의 진척은 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재촉하거나 잔소리하는 법이 없다. 지금껏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고 계신다.
대부분의 기다리는 마음은 걱정과 이해와 배려심을 동반하지만, 어머니의 기다림은 다르다. 그것의 밑바탕에는 믿음이 깔려 있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서일 뿐, 당신 아들이 머지않은 시기에 하고자 하는 일을 꼭 이루어 내리라는 강한 믿음인 것이다.
나는 이제껏 친한 친구나 동료들에게 하고 있는 일이나 고민을 허물없이 터놓으며 살아왔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어찌 부모가 자식의 일에 무관심하겠는가? 아마도 어머니는 염불암이라는 절이 보고 싶기도 했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을 게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나씩 하나씩 보여드리기로 했다. 막연한 것이라도 생각을 말씀드리기로 했다. 나도, 어머니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을 테니까.
--- p.112
몇 해 전 여름, 작업실 월세를 내지 못할 만큼 형편이 나빴던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일을 하더라도 가려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아무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 일당을 받으며 짐을 나르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얘기하지 않는다고 부모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작업실에서 글만 쓰던 내가 어느 날부터 땀에 젖은 빨래가 많아지고, 난생처음 해보는 육체노동이었는지라 눈에 띄게 살이 빠지고 있었으니,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두 달이 되었을 때 넌지시 내게 물었다.
“너 요즘 노가다 하나?”
이미 알고 계시는데 숨길 수 없는 노릇이다. 미루어 짐작은 하셨겠지만, 자식의 입을 통해 직접 그 이야기를 들으면 상처가 크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레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뜻밖에 의연했다.
“그래,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겠냐. 나는 그래도 이제라도 니가 일할 생각이라도 한 게 고맙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찌 타는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어머니가 이제껏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는 내게 사진을 배워보라고 한 것이다. 촬영을 위해 집을 나설 때면 같은 곳을 뭐하러 그리 자주 다니냐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속내는 아마도 이젠 사진을 그만두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머니가 어느 날,
“야야, 나도 사진이나 배워볼까?”
아마도 그것은 예쁜 풍경을 담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겠으나, 아들이 그토록 버리지 못하는 것을 당신도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과, 또 그를 통해 조금이나마 자식과 소통해보려는 마음 아니었을까? 혹시 잃어버릴까, 고장이 나지는 않을까 하며, 처음에는 가지고 다니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어머니가 이제는 알아서 사진을 척척 찍어 오신다. 전원을 켜고 셔터를 누르는 것만 알려드렸을 뿐인데 함께 간 친구들의 기념촬영 또한 남다르게 담을 정도로 수준급 실력이 됐다. 찍어온 사진을 보며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지만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다시 한 번 배운다. 사진은 마음으로 담아내는 것이라고.
--- p.119
조선시대 우성서禹聖瑞(1632~1669)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에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애틋했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친구들과 과수원에 가서 과일을 얻어도 함께 먹지 않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먼저 드렸는데, 부모가 어째서 먹지 않고 가져왔느냐고 하면,
“부모님 생각이 나서 감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우렁이 국이 반찬으로 나오자,
“내가 듣건대 이 우렁이는 어미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다 하니 차마 입에 댈 수가 없습니다.”하며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 우렁이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던가. 내게 있어 이제껏 ‘우렁이’ 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렁각시 설화뿐이었다. 한때 나는 어머니를 우렁각시라 여겼던 적이 있다. 부산에서 자취할 때 어머니는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부산에 내려오셨다. 다섯 시간 기차 타고 와서 내가 다니던 직장에 들러 집 열쇠를 받아가지고선 그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근처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며, 방 청소와 욕실 청소, 속옷을 삶고 이불빨래까지, 그 모든 것을 불과 하루 만에 뚝딱 해치우고는 다음 날 저녁에 바로 올라가셨다. 집에 돌아오면 깨끗해진 자취방에, 한 달 치 먹을 반찬들, 뽀송뽀송한 이불과 속옷, 다림질된 옷을 보며 우렁각시가 다녀갔네 하고는 혼자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우렁이는 자신의 살을 먹여 새끼를 키운다고 한다.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먹이로 주고 자신은 빈껍데기가 돼서 물에 떠내려간다고 한다. 어머니는 수년 동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부산까지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다녔으니 아마도 그때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어여쁜 우렁각시가 살림만 해놓고 간다 생각했는데 실은 자기 살을 깎아내는 우렁이의 모성母性이었던 것이다.
---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