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신약의 “복음”은 크나큰 의미를 지닌 단어이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표현으로서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어 예수님에 관한 자 신들의 선포된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복음” 은 케리그마 또는 선포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단어를 오늘날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가 그렇다. 물론 사도들이 의미했던 것보다는 보 다 협의의 의미로 종종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 p.35
복음서들은 이야기들과 어록들, 일화들과 연설(스피치)들을 엮어 서 하나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내레이터의 직접 적인 분석(혹은 심리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성격을 보여 준다. 또한 복음서들은 의식적으로 서로 간에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는데, 특히 모범적이고 교훈적이며 변증적인 면에서 그리고 기억을 돕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들에는 충분한 정도의 공유된 특성들이 존재하며 복음서들을 그리스-로마 전통의 비오스(bios)라는 장르의 일환으로 규정할 만한 충분한 “가족 닮음”이 분명 존재한다는 공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버릿지에게서 핵심적인 함의는 이렇다. 즉 우리는 더 이상 복음서들을 독특한 장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보다 중요하게 복음서들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는 우리의 기대를 비교 가능한 비오스라는 장르로부터 형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가적으로 하나를 더 지적하자면, 복음서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초점은 반드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p.73
우리가 앞서 “복음”의 의미에 대한 설명 중에 주목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복음서들에서 모든 것들을 회복하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약속에 대한 성취로 제시되고 있다(특별히 눅 4장에 나오는 사 61장을 보 라). 이 약속은 새로운 언약 관계와 죄의 용서에 관한 약속일뿐만 아 니라,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깨어진 것을 싸매고 비뚤어진 것을 바르게 하며, 모든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약속이다. 예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러한 치유와 회복을 행하셨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이 자비롭기 때문이거나 변호적으로 자신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진 특별한 분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치유와 회복의 사건들이 다가올 약속된 왕국을 보여 주는 묘사들이다.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의 사역들은 곧 다가오는 예기된 추수 감사절 성찬에 앞서 부엌에서 잘 삶아진 한 조각의 칠면조 가슴살을 어머니가 은밀히 선물로 미리 입에 넣어 주시는 것 과 같다. --- p.117
복음서들 간의 외형상의 불일치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예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서로 다른 기술들이다. 여기에 관련된 역사적인 질문들은 매우 많으며 복잡한데, 특히 공관복음 전승 내에 서의 차이점들과 특별히 공관복음서들과 요한복음 사이의 차이점들과 관련한 질문들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는 어거스틴이 특별히 자신의 저서 『조화』(Harmony, 제3권 전체)에서 집중 하고 있는 본문들 중 하나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게 되면 최후의 만찬이 언제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최후의 만찬이 공식적인 유대 전 통의 유월절 식사에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이야기들의 차이점이 암시하듯이 이 날보다 하루 앞서 이루어졌는가? 또한 최후의 만찬 에서 실제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잔을 들고 몇 번의 축복 기도 가 있었는가(한 번인가 아니면 누가복음이 보여 주듯이 두 번인가)? --- p.149
복음서들의 차이점들을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관점 은 예수님의 사역이 지닌 “순회적 성격”(Itinerant Nature)을 인식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여러 번 우리는 예수님이 특정한 몇몇 가르침 들을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들 을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차이점은 몇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여행하시며 말씀을 전하셨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다양한 장소들에서 많은 유사한 것들을 (거의 확실히) 말씀하셨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p.159
복음서들은 신학적인 주창들과 역사적인 주창들을 동시에 하고 있으며, 이 주창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목표가 아니라 “증언”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단일한 실행이다. 또 다시 이 둘 사이에는 균형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희생시키면 서까지 다른 하나를 너무 강조하여 결국 둘 다를 무효화시키는 우를 범한다. 만약 우리가 복음서들을 성육신과 부활이란 역사적 실체로 부터 유리된 채로, 단지 장엄한 신학적인 아이디어와 이상들을 담고 있는 저장소들로만 접근한다면 그때 우리는 역사를 잃게 된다. --- p.250
앞에서 지적한 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중첩되는 또 하나의 요지로서, 역사를 “증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복음서 읽기에서 복음서들을 다른 사건들과 실체들을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으로 사용하지 말고, 본문들 자체를 “증언” 혹은 증거들로 읽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 이야기들이 지닌 본질상 역사적인 진실성과 동시에 이 이 야기들이 “증언”하고 있는 실제 역사의 중요성을 확언하는 반면,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본문을 본문-이면에 있는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재구성으로 대체해서는 안 되며, 또한 이러한 재구성을 본문 읽기의 마지막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 복음서들 자체의 “증언” 외에 본문-이면의 사건들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으며, 열광적으로 이런 사건 자료들을 찾는 것은 정경복음서들과 영감 된 복음서들, 즉 이런 사건들에 대한 “증언”인 복음서들이 분명 가지 고 있는 바를 부인하는 것이다. --- p.346
복음서들이 지닌 결정적이고도 우선 되는 측면은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하나의 계시(revelation)라는 점이다. 원천부터 모든 전반에 걸쳐 복음서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이스라엘, 다윗 그리고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하나의 계시이다. 31 이런 점에서 복음서 읽기에 대한 우리의 첫째 되고 결정적인 목표는 복음서의 본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구이신지 를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찾아내고 파악하는 것이다. 일차적이고도 주된 초점은 계시로서의 복음서에 주어져야 한다.
--- p.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