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숲 속 생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기
이미정(justicemj@yes24.com)
- 제목에 매료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여지껏 살아오면서 교재와 관련문헌들을 제외하고는 '자연과학'분야의 책들과는 담쌓고 지내온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자연과 숲의 연대기』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제목을 처음 접한 순간 신영복님의 저서『더불어 숲』의 서문 한구절이 머리를 스쳤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라는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간결한 문구. 그 덕분인지 그저 단순한 과학이야기가 아니라, 조금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를 사로잡았고, 물론 그 맥락이야 다르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표면적으로는) 위의 구절이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원제가 궁금해 찾아보니, 이 책의 원제는『TREE-A Life Story』였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면서, 직역했다면 조금은 심심했을 원제 그대로 보다는, "나무와 숲의 연대기"라는 서명이 왠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숲 속 생물들의 아름다운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비범한 독창성과 상상력을 갖춘' 구성으로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 한 그루의 나무의 삶을 이야기하다 : About "A Tree"
이 책은 '더글러스-퍼(Douglas-fir)'라는 나무의 일생에 대한 전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명한 환경운동가이자 생물학자이며 세계 각지에서 노령림 보호운동을 펼쳐온 저자는 나무 한그루의 생애를 줄기 삼아 온갖 생물의 역사와 생태계 등 수많은 이야기들로 가지를 뻗치고, 이것들을 매우 튼실하게 재구성해 낸다. 이 책의 주인공은 북미 캐나다 서해안 해변의 울창한 숲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더글라스-퍼'라는 나무인데, 이 책에는 '더글라스 퍼'라는 명명과, '우리나무' 혹은 '우리 씨앗'이라는 명명이 번갈아 반복되며 여러차례 등장한다. 객관적인 생물명과 조금은 주관적인 이름붙이기를 번갈아 시도하며, 객관성을 유지한 논픽션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집 근처에 있는 키 50m, 둘레가 5m에 이르며 수령이 400년쯤 된 더글러스-퍼 나무를 세밀히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한 나무의 일생을 탄생에서부터 뿌리내리기, 성작, 성숙, 죽음의 5단계로 나누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한그루의 나무의 생장과정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형성과정과 (박테리아 등의 미생물부터 인간을 아우르는) 생물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세세하고 충실한 설명으로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만 살펴보아도 이 책은 상당히 '깊이 있는 생물학 교과서'로서의 제 몫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생물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 숲과, 생태계를 이야기하다. : Beyond the Story
이 책은 나무 한 그루의 처음과 끝을 화두로 북미대륙 녹색 자연의 모든 역사를, 지구라는 유기체 전체의 자연사를 망라하고 있다. 나무 한그루의 생애를 줄기 삼아, 다른 시대와 세계 모든 곳을 우리와 연결시키며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모든 나무, 모든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가 더글러스-퍼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숲 속 생태계의 아름다운 공존'이다. 나무는 저마다 숲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숲 속의 나무들은 흙 속에서 뿌리끼리 서로 섞여서 하나가 된다. 서로 소통하고, 서로서로 나누며 돕는다. 나무들의 공존뿐 아니라, 숲에는 다람쥐, 진균류, 점박이 올빼미 등 수많은 개체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저자는 그네들의 삶을 "연대"와 "공존"이라는 큰 주제 속에서 훑어내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강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매우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숱한 동식물의 보금자리와 피신처가 되어주며 죽은 후에는 같은 군에 속한 나무들의 거름이 되어주는, 즉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의 위대한 일생을 그리고 있지만, 서술에는 조금의 과장이나 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마지막 장을 통해 이러한 나무와 숲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꼭 필요한 것임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 할 뿐이다. 텍스트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와 메시지는 온전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풍부한 사례와 자세한 설명으로 자연과학과 관련된 우리들의 상식을 뒤집고,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에게 해악으로 여겨져 온 산불이 우리나무(더글라스-퍼)에게는 새 생명의 씨앗을 세상에 내보내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음을 책의 서문에서 보여줌으로써, 산불은 자연 현상의 하나일 뿐 결코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깨닫게 해준다. 또한, 동물보다 단순한 구조라고 생각해온 식물의 생장과 발달과정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인지를 자신의 전문분야(이 책의 저자는 유명한 생물학자이다)적 지식을 활용한 풍부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해시킨다.
- 분야를 넘나드는 해설, 세밀한 그림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다.
이 책에는 나무의 일생과 생태계와 관련한 이야기 외에도 그 곁가지로 무수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더글라스-퍼를 처음 발견하고 명명한 데이비스 더글러스의 삶과, 수많은 자연철학자와 생물학자들이 동식물을 어떻게 연구해왔는지 등이 생물학의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설명을 전개함에 있어서, 문화인류학이나 (자연) 철학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적 구조와 화려한 수식이 돋보이는 수려한 문체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학 도서라는) 책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들만큼 흥미롭다. 하지만 저자는 언제나 커다란 줄기를 잃지 않는 듯 하다. 유전과 진화 등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문화인류학, 철학을 아우르며 이야기가 확대되어 가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는 식물의 번식과 생태계를 설명하는 도구와 장치로 기능한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듯 하지만, 언제나 이야기는 어느새 적절한 위치에 자리잡고 독자들의 이해와 지식의 확장을 돕는다. *를 활용한 (역자의) 설명 또한, 자연과학의 용어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배려임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마치 사진을 옮겨놓은 듯한 (더글라스-퍼와 붉은 등들쥐, 회색곰, 점박이 올빼미 등 숲에 서식하는 동물들의) 세밀한 그림은 이 책의 가치와 책 읽는 재미를 한껏 높여준다. 환경운동가이며 세계적인 화가인 로버트 베이트먼의 정겨운 세밀화가 너무나 생생하게 펼쳐진다.
7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동물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한 나무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주는 책『나무와 숲의 연대기』. 이 책은 분명 우리에게 생태계의 소중함을,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글솜씨의 부족으로, 그리고 충분치 않은 지면으로 책의 강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글을 끝마쳐야 함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백마디의 화려한 수식보다도 책의 한두 페이지가 책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작은 위안을 삼아 본다. 책을 통해 '나와 한 그루의 나무가, 그 나무와 인연을 맺은 작은 미생물 하나, 새 한마리, 늑대 한 마리가 나와 무관치 않다.'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