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상상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십이월 2세’라고 불리는 작디작은 임금님의 이야기이다. 그의 체격이나 거처 등의 크기, 그가 입는 의복이나 먹는 음식은 어느 동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주 작고, 그의 생각은 신기하며 그의 행동은 어른이 보기에 아주 앙증맞고 희화적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작디작은 임금님은 붉은색 외투가 배 부근에서 잠기지 않을 정도로 뚱뚱하지만 말랑구미를 먹고 사는 그의 몸 크기는 집게손가락보다 작아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양복 새끼주머니 속에 숨고, 아주 작은 벽 틈바구니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왜소하다. …
이 작품은 모두 다섯 개의 환상적 즉 동화적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이 책의 화자인 회사원인 ‘내’가’ 뜻하지 않게 ‘작디작은 임금님’의 방문을 받고 임금님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로 시작되며, 내가 임금님의 초대로 방문했던 그의 왕실에서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임금님과 내가 시내로 갔던 나들이에서 겪은 이야기, 임금님과 내가 함께 보냈던 어느 멋진 여름밤의 이야기로 연결되며, 어느 겨울 난로 가에서 그와 내가 함께 겪은 마지막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
이 책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알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상한 나라’와 같은 세계가 있다. 화자의 집을 작디작은 임금님이 방문하면서 시작되는 이 책은, 임금님의 질문에 대해 ‘나’는 세상에서의 탄생, 성장, 노년 및 죽음으로 끝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작디작은 임금님의 세계관은 ‘나’ 즉 그 밖의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적 세계관을 뒤집는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생물학적으로 성숙하고, 지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가 시간이 갈수록 육체적으로 끊임없이 작아지고 정신적으로는 끊임없이 망각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며, 인생은 자유를 확장하고 꿈을 펴가는 발전과정이 아니라 현실에 속박되어 가능성을 상실하는 축소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꿈의 수집이며, 산다는 것은 그렇게 수집한 꿈들이 담긴 상자들이 열림에 따라 꾸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사람들이 잠드는 저녁에 시작해서 아침에 사람들이 깨어나면 잠깐 쉬는 것이다. 잠드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고, 깨어있는 것을 잠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서 마땅해.” “그러니까 자넨 아침에 잠이 들고는 하루 종일 회사원이 되어 죽어라 일만 하는 꿈을 꾸는 거야.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깨어나서 밤새 진짜 자기 자신이 된 것이지.” 아니 모든 것이 꿈인지도 모른다. ”자네는 내가 나오는 꿈을 꾸는 거고, 나는 자네가 등장하는 꿈을 꾸는 것이라네.” 라는 말을 듣고, “하지만 임금님은 지금 깨어 있는 것 아닌가요? 주무시는 게 아니잖아요?’ 라는 회사원인 나의 질문에,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안다는 건가?”라고 대답할 때, 작디작은 임금님은 “자신이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한 장자와 똑같이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철학적 역설과 씨름하고 있다. …
“십이월 2세”라는 이름의 작디작은 임금님은 과연 누구이며, [작디작은 임금님]이라는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가? 상상적 인물인 “십이월 2세”는 첨단과학기술문명에 의해 게놈, 줄기세포라는 미세한 물질로 축소되어가는 21세기 인간상이며, 동화 아닌 동화인 [작디작은 임금님]의 의미는 나노, 컴퓨터, 인터넷, 우주선으로 나타난 경이로운 기술문명, 그것의 작동원리로서의 기계적 세계관이 몰고 온 삭막한 풍경에 대한 의식, 회의, 비판 즉 문명, 세계, 존재를 보는 새로운 시선, 시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궁극적 메시지는 문명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세계관의 혁명의 필요성이며, 이 작품의 마술적 힘과 그러한 힘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경험은 바로 그러한 메시지 전달의 미학적 뛰어남의 증거이다. 작디작은 임금님은 거대한 마술사이다. 그러나 이 책에 들어 있는 보배들은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면서 그 맛을 씹어보고 또 씹어보는 독자에게만 주어진다.
박이문(철학가/시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