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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페미니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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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top100 8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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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11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290쪽 | 432g | 153*224*20mm
ISBN13 9788991799127
ISBN10 899179912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머리말 |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

1부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위험한 여성들 / ‘대중적인’ 여성운동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협상과 공존의 사유, 페미니즘
공략하지 말고 낙후시켜라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없는 사람들 / 움직일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여성
“성(姓)을 갈다”, 어머니의 섹슈얼리티 / ‘더러운’ 노동, 불가능한 임무
혐오스런 아줌마, 신성한 어머니

여성주의,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
1.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 / 2. 말과 성차별
3. 여성주의 언어란 무엇인가 / 4.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정치학

사랑과 섹스
1. 남자는 외롭다? 여자는 더 외롭다! / 2. 여성의 섹스, 남성의 섹스
3. 다이어트와 섹스 / 4. 스와핑에 대하여
5. 여관의 정치경제학 / 6. 늑대와 여우의 사랑?

2부
가정폭력의 정치학
진보와 보수는 누구의 전선인가 / 진보의 개념을 넓히다?
인류 공통의 역사, 가정폭력 /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진보 없는 한국의 ‘진보’
아버지를 닮은 아들들의 폭력 / 과거사 청산 담론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매춘 여성?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 / 남성 언어로 말하기의 고통
피해자 중심주의와 여성 범주의 딜레마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인권
누가 인간인가?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
개인적인 것은 왜 정치적인 것인가? / 여성 인권 문제와 탈식민주의
인권의 시각에서 다시 묻는 여성 차별과 폭력 / 무엇이 인간의 권리인가?

3부
나이 듦, 늙음 그리고 성별
‘육체 분석학’으로 세상을 볼 때 / 한국 사회의 연령주의 정치학
여성의 늙음과 남성의 나이 듦 / 여성의 순환에 의존하는 남성 질서
영화 <집으로>와 <죽어도 좋아>의 여성 노인 / 몸에 새겨진 계엄령

‘성판매 여성’의 인권
성매매, 근절과 허용의 크레바스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문제라고 보는가’
‘성판매 여성’이라는 범주 / ‘강제’와 ‘동의’의 구분은 ‘중요하다’
권력은 듣는 자에게 있다 / 성과 사랑은 노동이어야 한다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국가, ‘포주’에서 ‘보호자’로 / ‘성판매 여성’과‘페미니스트’
왜 구매자인 남성의 이름은 없는가 / 성폭력, 인신매매로서 성매매
성 노동자로서 성판매 여성 / ‘제국’적 상황, 성폭력과 ‘성 노동’을 넘어서
여성 억압을 누가 말할 것인가?

군사주의와 남성성
<알 포인트>의 근대성과 남성성 비판 / 군사주의와 성별화된 시민권
한국 ‘평화운동’의 군사주의와 남성성 / 남성 섹슈얼리티와 군사주의
남성 연대 대신 타자와의 연대를

|후기 | 변태하기 위하여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여성주의는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 협상과 공존의 사유이다
나는 페미니즘은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생겨난 지 3백 년도 안 되었지만, 한국에 자본주의가 들어온 지 1백 년도 안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의 위력으로부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 p. 40

여성주의는 여성도 인간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 언어의 내용은 물론이고, 담론의 형성 구도 자체가 붕괴된다. 여성이 인식 주체가 되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흔들리고 재구성된다. 그러니, 어찌 여성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랴. --- p. 34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누가 나더러 여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말을 소개한다. “착한 여자만이 천당 갈 수 있다.”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라면, 여성주의는 “나쁜 여자가 천당 간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와 거리가 멀다.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우리나라 부모나 교사들 중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천당에 가기 위해 남자에게 순종하며 ‘착한 여자’로 살기보다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 있는 ‘나쁜 여자’로 살면서 어디든 가길 바란다. --- p. 69~70

성녀(聖女)와 성녀(性女)로 나뉘는 여성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분류, 분리되는 방식인 성녀(聖女 혹은 石女)와 성녀(性女), 정숙한 여성과 순진한 여성, 본처와 애첩, 아내와 애인……은 배타적인 범주 같지만 남성을 위한 여성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여성은 상황에 따라 ‘정숙하면서도 섹시한’, 이 모순된 요구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남성 판타지가 원하는 것은 성애화된(sexualized) 모성, 모성화된 성애(sexuality)이다. 대개의 부부 싸움, 아내에 대한 폭력은 아내가 ‘어머니 같은 이해심’과 ‘매춘 여성의 섹시함’을 동시에 감당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유흥업소를 찾는 남성 고객이 매춘 여성에게 사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녀의 몸이 아니다. 그는 그녀의 배려, 대화, 보살핌 그리고 ‘오빠’, ‘당신이 최고’라는 칭찬과 격려를 원한다. --- p. 55

매 맞는 여성들은 왜 죄의식을 느낄까

국가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 역할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피해자에게 해결사 역할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가정폭력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 p. 124

한국사회는 폭력당하는 여성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담론 구조도, 그들을 지지하는 공동체도 없다. 그들의 고통은 가족의 문제가 되거나, 자녀의 고통이 강조될 때만 부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낀다(“나는 왜 참을성이 없을까?”) --- p. 127

여성주의는 ‘차이’와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기존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목소리가 전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대안)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일(단일)한 것으로 군림해 왔던 서구 남성 중심의 목소리는 급속히 상대화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기존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p. 44

여성주의 언어란 무엇인가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약 5천 년 동안 남성은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 여성은 흔히‘곰과 여우’, ‘본처와 애첩’, ‘성녀(聖女)와 성녀(性女)’, ‘어머니와 창녀’로 구분되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계급과 정체성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여성의 지위는 몸/성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정숙한 여성’과 ‘문란한 여성’이라는 말은 있지만, ‘정숙한 남성’ ‘문란한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 p. 72, 74

남자는 외롭다? 여자는 더 외롭다

물론 남자는 외롭다. 어떤 면에서는 감정 표현을 억압당해 온 남성들이 더 외로울 수도 있다. 남성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버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그만큼 외로움을 호소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남성의 외로움은 많은 경우 남성과 남성 간의 갈등에서 발생하지만, 여성의 외로움은 남녀 간의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또한 남성의 외로움은 보살핌의 가치나 감정 영역을 폄하해 온 남성 문화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남성 외로움의 ‘가해자’가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도 타인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감정 노동의 영역에 참가하는 것이 남녀 모두가 사는 상생의 길이다. --- p. 91~92

‘순결한’ 피해 여성도, ‘타락한’ 성판매 여성도 없다

한국 남성들이 “우리도 일본 여자를 강간하자.”라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공식적인 전쟁 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 침해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 p. 141

여성의 사회 진출?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양성 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내가 피하는 말들 중 하나다. ‘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가지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했던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 p. 103

“그들이 직접 말하게 하라”

여성주의 사유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성의 역사가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다 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여진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 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들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를 남성을 여성주의자로, 여성을 성판매 여성으로 바꾸어 본다면 무리일까? 이런 치환은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비장애 여성과 장애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관계에 모두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p.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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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페미니즘의 최전선에 선 젊은 여성학자 정희진의 도전적 선언!

이 책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쓸 수 있는 새로운 언어의 교본이며,
여성과 남성이 함께 행복해지는 새로운 세상의 선언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의 눈’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새롭게 들여다볼 것을 요청한다. 이 책에서 정희진은 군 위안부 문제, 스와핑, 성판매 여성들의 시위, 위안부 누드 사건에서 박근혜 패러디까지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된 여러 이슈와 사건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해석한다. 찬성 아니면 반대라는 단순화된 이분법적 시각을 뛰어넘는 정희진의 새로운 재해석은 언제나 새로운 발견, 새로운 각성을 낳는다. 나아가, 저자는 여성과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성판매 여성 등 오랫동안 소외당해 온 우리 사회의 ‘다른 목소리’들이 서로 경쟁하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즐겁게, 그래서 행복하게 ‘나’를 열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정희진이 꿈꾸는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만드는 세상이다. 페미니즘은 투쟁과 쟁취가 아닌 협상과 사유, 공존과 상생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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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은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페미니스트는 남자들과 싸우려고만 드는 과격한 여자들이며,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내용은 많이 배운 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통속적으로 널리 퍼진 고정관념은 이 책을 통해 산산이 부서진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여성의 눈으로 이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자고, 여성의 목소리로 이 세계를 재구성해보자고 요청한다.
“너희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조목조목 사례를 들이대면서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자들의 한가한 이야기”라며 비웃는 일반적인 남성들의 논리에 대해, 정희진의 이 책은 그런 주장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오만한 것인지 절실하고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정희진이 보여주는 여성의 언어는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그 토대에서부터 가차 없이 무너뜨린다.
정희진은 결코 싸움을 부추기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한국 사회의 억압적인 지배 구조를 지적하고 비판하지만, 그녀가 인간을 대하는 눈은 결코 따뜻함과 공정함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다만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요구할 뿐이다.

정희진은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됐던 여러 이슈와 사건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해석한다. 군 위안부 문제, 스와핑, 성판매 여성들의 시위, 위안부 누드 사건에서 박근혜 패러디까지……. 찬성 아니면 반대란 단순화된 이분법적 논란을 뛰어넘는 정희진의 새로운 재해석은 언제나 새로운 발견, 새로운 각성을 낳는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단순한 페미니즘 이론의 소개도 아니고, 여성적 경험의 대책 없는 토로도 아닌 이론과 현실이 구체적으로 결합된 절절한 목소리의 한국 여성주의 텍스트가 된다. 나아가 서구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한국적 여성 현실의 미세한 떨림까지 드러내는 독특한 텍스트가 된다.
기존 여성주의 책들이 여성주의 사유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겐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이론적인 책들이었다면, 이 책은 기초부터 시작한다. 여성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여성주의를 통해 나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기를 갈망하는 정희진의 글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깊이 있는 글임과 동시에 현실과 치열하게 만나는 구체적인 텍스트로 여성주의를 낯설어하던 사람들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근래 보기 드문 페미니즘 교양서이다.

정희진은 차갑고 따뜻하다.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편견과 남성의 언어에 맞서지만, 여기서 그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을 포용할 줄 아는, 반성할 줄 아는 자의 뜨거운 마음이다.
정희진은 여자들이 잘못해서, 여자들이 사회의식이 없어서 남자들에게 당하고 사는 거라고 야단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사는 여성들, 페미니즘을 막연하게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여성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나의 목소리로 나를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새로운 언어의 시대를 선언한다. 이 책은 그 자체로 새로운 언어의 교본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는 일종의 선언문이다.

소통과 공존을 찾아 가는 ‘위험한 여성’의 목소리!

정희진은 분명 매우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다. 그녀의 주장은 때로 도발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듯 보여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는 걸 이 책은 알게 해준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입한 또 다른 ‘편견’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보편이라 믿었던, 객관이라 믿었던 세계가 편견과 왜곡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명쾌한 도전이며, 인식의 밑바닥을 균열시키는 위험한 글이다.
정희진이 말하는 다른 목소리에는 여자뿐 아니라, 장애인, 유색 인종, 성판매 여성 등 지금까지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변방의 목소리들이 포함된다. 정희진은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이 경쟁하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 즐겁게, 그래서 행복하게 나를 열 수 있는 세상.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꾼 다음에 정희진의 충격적인(?) 주장을 읽고 나면 처음과 달리 그녀의 주장이 전혀 도발적이거나 충격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상식이다.

정희진은 남자들과 싸워서 그들을 물리치고 세상을 차지하자고 부르짖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은 다른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머리를 열어놓자는 것이다.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우리’에 대해서도 생각하자는 것, 나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투쟁과 쟁취가 아닌 협상과 사유, 공존과 상생의 길이다.

정희진은 매우 솔직하다. 이 책에는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로서, 자신이 겪은 수많은 관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희진은 때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보아 왔으며, 그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솔직히 고백한다. 그녀는 지금 자신도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 중이며 때로 상처받고 상처를 준다고 말한다. 계속 걷지 않고 멈춘다면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도 치열하게 존재의 변태를 꿈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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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노트

먼저 얼굴이 뜨거워지고(나의 무지와 편견이 부끄러워서), 다시 가슴이 뜨거워지고(나의 현실을 새삼 자각하게 되어서) 서서히 머리가 불타듯 뜨거워지는(지금까지 나를 구성해 왔던 남성 중심 세계관의 전복에서 오는 충격과 희열) 글들이었다.
또한 이 책은 나에게 전복적인 사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남자의 눈을 이식받은 여자로 살아왔는지 알게 해주었으며, 내가 어떻게 남성의 언어로 말하고 생각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몹시 아프면서도 통쾌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동시에 세상이 확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맺은 모든 관계, 특히 남자들과의 관계를 다시 되짚어보게 해주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 동생에게, 후배들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흔히 말하듯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됨과 동시에 여자들 안에서도 삶의 조건에 따라 수많은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 여성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며, 그 차이는 무엇인지, 왜 그런 차이가 생겨났는지도 알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성주의 기본 이론서로도 손색이 없다.
그녀의 너무도 솔직한 고백을 듣고 있자니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이 상대에게 큰 상처가 된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 왔기 때문이다. 고민하지 않는 게 죄가 되는 건 이런 경우가 아닐까? 그러나 정희진은 괜찮다고 어깨를 다독여준다. 그것을 알았으면 앞으로 바꾸어 나가면 된다고 말해주는 그녀가 고맙다. 또한 한 발 먼저 내딛은 선배로서 세상의 후배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인 그가 고맙다. 나는 이 책으로 비로소 지금 내가 수많은 ‘정희진들’이 만들어놓은 징검다리를 편하게 밟고 건너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이승희(교양인 편집장)

회원리뷰 (20건) 리뷰 총점8.4

혜택 및 유의사항?
과격한 제목 뒤의 따뜻한 시선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i**o | 2006.01.31 | 추천4 | 댓글0 리뷰제목
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해 강력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 왔다. 그러나 은 달랐다. ‘안다는 것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라며 첫머리를 시작한 저자는 페미니즘을 통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와 ‘차별’을 강조하는 대신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관계와 소통에 대한 그녀의 긍정적인 시선은 ‘안티 페미니스트’의 편견과 선입견을 가차없이 무너뜨린다. 전복;
리뷰제목
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해 강력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 왔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도전>은 달랐다. ‘안다는 것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라며 첫머리를 시작한 저자는 페미니즘을 통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와 ‘차별’을 강조하는 대신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관계와 소통에 대한 그녀의 긍정적인 시선은 ‘안티 페미니스트’의 편견과 선입견을 가차없이 무너뜨린다. 전복적인 사고와 새로운 삶의 조건을 생각케 한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고민을 던져준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저자의 신랄하고도 통렬한 비판을 읽으며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떠올랐다. 그들의 지성이 진정성을 갖고 있는 건, 의사소통에 대한 이해와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4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4 댓글 0
페미니즘이란 어떤 것인가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푸**늘 | 2005.11.23 | 추천3 | 댓글0 리뷰제목
내가 잘 모르지만 알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페미니즘이다.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권리회복이라는 것이 사실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멍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은근히 페미니즘에 대해 응호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비 페미니스트적인가를 깨닿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뜻, 정의 자체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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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모르지만 알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페미니즘이다.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권리회복이라는 것이 사실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멍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은근히 페미니즘에 대해 응호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비 페미니스트적인가를 깨닿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뜻, 정의 자체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러기에 저자 자신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실망도 느끼고 절망도 느낀다고 누누히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페미니즘에 관한 책중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호되게 야단치는 선생님이 훌륭한 선생님일수 있듯이, 아주 야무지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책이 정말 제대로 된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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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d******7 | 2008.05.12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수전 스워츠, 쥬시 토마토, 시그마북스, 2007얼마전에 딸애와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개그공연을 본 적이 있다. 워낙 작은 공간이라 앞줄에 앉은 내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출연자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어머니, 왜 안 웃으세요? 이해를 못하셨어요?”그 개그는 이해를 하고 못하고 여부를 따질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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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수전 스워츠, 쥬시 토마토, 시그마북스, 2007


얼마전에 딸애와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개그공연을 본 적이 있다. 워낙 작은 공간이라 앞줄에 앉은 내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출연자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왜 안 웃으세요? 이해를 못하셨어요?”
그 개그는 이해를 하고 못하고 여부를 따질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웃지않는 이유를 개그가 썰렁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내가 나이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해를 못했냐고 말한 것이다. 살짝 놀라서 “통과!” 하고 말았지만 은근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연령차별주의는 세상에 널려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서른 넘어 공부를 계속하려고 대학원 사무과에 갔을 때, 직원에게서 따님대신 오셨냐는 질문을 들었단다. 그 일로 해서 한동안 분노를 금치못했던 정희진은,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체험과 억압을 속속들이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나이듦의 차별을 겪어본 뒤에야, 왜 그토록 남자들이 여성운동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지를 비로소 이해했다는 것이다. 자기자신도 20대에는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정희진은 연령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면에서 한국사회는 계엄령이 필요없는 사회다. 사회구성원들의 상상력, 용기, 소망은 나이에 따라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대단히 자발적으로 나이듦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으며, 나이든 자, 나이든 여성을 혐오한다.
일상의 아주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나이듦에 대해 동일한 해석 틀을 지니고 있으며, 미세한 검열과 규율에 예속되어 있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나이든 사람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선을 다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반 연령주의 정치를 시작해야 할 것같다.”


나이에 따른 역할을 조금만 벗어나도, 낙오자 혹은 수용불가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모두 똑같다. 수명연장시대에 사람들의 자의식은 이전과 비교할수없이 젊어지고 섬세해졌는데도, 연령주의의 편견은 철옹성처럼 우리를 옥죄고 있다. 가족관계에서는 ‘개인’이 사라지고 오직 의무만이 남아있다. ‘모성’만 가진 존재로 기대되는 어머니, ‘책임’만 살아있는 ‘가장, 대중매체에서 주책맞거나 탐욕스럽게 그려지는 나이든 사람의 이미지, 철저하게 차단되는 사회적 기회... 아직 창창한 나이에 조직 밖으로 내몰린 ‘사오정’과 ‘오륙도’들이 어떻게 연령차별주의의 폭력을 견디어내는지 궁금하다.


나역시 연령주의에 민감한 나이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젊었을 때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관점이며, 아직도 스스로 빠져있는 함정이기도 한다. 친정어머니께서 얼굴의 점을 빼신 것을 보고 속으로 흉보는 식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걸맞지 않은 고정관념으로서의 연령주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깨나가야 할 과제이다. 더욱이 신문지상이나 통계로 보는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떻게 나이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기존의 편견에 맞서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품위있게 나다움을 유지할 것인가.


“흔히 말하는 의식은 바뀌었는데 몸이 바뀌지 않았다라는 개탄은 일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상을 넘거나 일상을 극복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정치와 운동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머리가 변하는 것이 의식화라면 몸이 변하는 것은 변태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거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개혁은 글자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수밖에 없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모든 변태는 의미를 생산한다. 의식화는 변절이나 전향이 가능하지만 변태는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의식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변절이 불가능하다.”


정희진이 명료하게 분석하듯, 의식은 몸을 따라오지 못한다. 머리가 아닌 몸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내 전부를 걸어야 한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대우를 받으며, 끝까지 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생존을 건 사활의 문제이다. 여기에 연령차별주의를 뚫고 자기식대로 날아오른 역할모델이 있다. “쥬시 토마토”란 저자가 만든 용어로, 한창 무르익어 더욱 향긋해진 중년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에는 나이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불평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나이에 비례하여 힘이 생긴 것을 자각한 여자들의 사례가 그들먹하다. 그들은 혼자서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기도 하고, 은퇴후 일을 찾는 여성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하기도 하고, 정부생활보조금으로 4자녀를 혼자 키운 여성이 정치에 눈떠 55세에 미하원에 입성하기도 하며, 요트를 운전하며 트레일러에 살면서 전선배선과 단열처리를 직접 시공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맛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더 보기좋은 몸매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대해 기분좋게 느끼게 되면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 몸과 마음이 해방된다. 체력이 강해지면 정신적으로도 독립이 된다. 바로 이것,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질지 걱정스러워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긴장하고 이완하는 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운동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아주 새로운 세상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남아도는 시간과 남아도는 정열을 활용하여,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된 여자들은 열정적으로 ‘변태’를 선택했다. 자기혁신을 계속함으로써, '천천히 죽어가는 것'대신, 시대의 변종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생의 전반부에서 어지간한 고난을 다 겪어온 체험과,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담대함은 “슬픈 때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책에서 발견하는 기분은 최고다. 외롭지 않다.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자유, 열정, 창조... 내 안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할머니 히피인들 되지 못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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