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되기만 한 일은 아니다. 요즘 뜬다는 생명공학/나노/정보 기술, 소위 BT/NT/IT 융합을 주제로 하는 어떤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다. 알 만한 기관에서 알 만한 연사들을 초청한 행사였기에 기대가 자못 컸는데, 그만 엉뚱하게도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강연의 요지가 아니라 순서 중에 나노 기술의 아버지라 소개된 이름, “페인만”이었다. 눈앞의 커다란 화면 한 곳에서는 틀림없이 “Feynman”이라는 글자를 마주하던 순간이었다.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 이름 좀 다르게 읽었기로서니 저리도 유난을 떨 거야 뭐 있을까만, 그래도 충격이 큰 노릇을 어쩌겠는가?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에인슈타인이 아니듯, 파인만 또한 적어도 페인만은 아니므로.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이론물리학자치고는 대중에게 그나마 많이 알려진 편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그 이름이 생소한 사람들도 그 못지않게 적잖은가 보다. 사실, 파인만은 자신이나 주변인들이 전한 솔직하고 재미난 여러 일화 덕에 사람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하나, “천재”라는 수식어 탓에 사람들이 멀게만 느끼거나 아예 모르고 지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천재: 리처드 파인만의 삶과 과학》은 철저한 자료 조사에 입각하여 예리한 시각으로 이 물리학자의 인간적, 학문적 한살이와 20세기 물리학의 흐름을 천연스럽게 교직해내며, 무엇보다도 한 개인 특유의 천재성이 어떻게 빛나게 되었는지를 파헤친다. 저자 제임스 글릭은 이공계 출신이 아니지만 전작 《카오스》에서 유감없이 솜씨를 발휘했듯, 문외한의 눈높이에서 과학과 과학자의 세계를 독특하면서도 정확한 어법으로 그려내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글릭은 파인만이 직접 남겼거나, 인용, 언급되었던 개인적, 공식적 기록을 일일이 들춰보고 파인만의 식구들, 친구들, 동료들과 그 밖의 지인들을 세심히 취재하여, 그동안 인간 파인만에 대해, 물리학자 파인만에 대해 무심코 지나쳤거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까지 짚어가며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세기의 천재를 되살려냈다.
파인만의 천재성은 어디서 왔는가?
파인만은 자신이 보통 사람이며 열심히 연구했을 뿐이라고 했다. 마크 카츠가 불가사의한 최고 수준의 마법사라고 칭한 것과 달리, 파인만 스스로는 기적을 행하는 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재능이나 특별한 능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자신도 다른 여느 사람처럼 궁금하고 필요한 것을 알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게다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했으니, 양자역학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양자전기역학을 재정립한 천재 학자의 말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파인만은 못 말리는 노력파였다. 학부 시절 MIT에서는 앞서 가며 닥치는 대로 물리학과 전공과목을 수강하고 교재와 문헌을 열심히 탐독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이미 두 차례나 《피지컬 리뷰》에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 당시 이론물리학 거의 전반을 두루 섭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원 시절에도 학생은 학생이었던지라, 가령, 반타작밖에 안 되더라도 통과가 가능할 정도로 악명 높은 박사과정 자격시험을 앞두고서는 아는 이들 없는 곳에서 방해받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하려고 프린스턴을 떠나서 몇 주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자연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근본적으로 이해하고픈 파인만의 열망과 집념, 문제를 (그것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 책은, 파인만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은 가르침―권위에 주눅 들지 말고 외형에 현혹되지 말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본질을 차근차근 따져나가라―을 본으로 삼아 과학 하는 기본자세를 어떻게 갖추어나갔는지, 학업과 연구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와 고통을 맛보면서도 결국 어떻게, 깜깜하던 학계에 경로 적분과 파인만 다이어그램이라는 눈부신 빛을 비추게 되었는지 여과 없이 추적함으로써(누구 말마따나 파인만이 생전에 이를 읽게 되었다면 무척 좋아했으리라), 읽는 이로 하여금 천재의 개인성, 사회성, 초월성에 대한 (상당 부분 쉽게 과장된) 통념을 반추해보게 한다.
아울러 당연하겠지만, 줄리언 슈윙거, 프리먼 다이슨, 머리 겔만 등을 중심으로 파인만과 시대를 같이한 물리학계의 거장들―이들 역시 특징은 제각각이어도 “천재”적이다―을 (때로는 파인만과 직접 비교, 분석하는 대상으로) 등장시켜 이들의 사고방식, 활약상은 물론 인간적인 동료애나 경쟁심이 드러나는 이야기도 전하며, 동시에 학문적, 문화적 큰 줄기 또한 놓치지 않는다. 다만, 파인만의 사후 학계 발전에 대한 영향력, 이를테면 끈 이론이나 양자계산/컴퓨터 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원작의 출간 시기로 보아 다소 이른 감도 있긴 하나) 다루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파인만의 일대기에서 심히 중요하기에 유명한 일화들은 간혹 겹치고, 일부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장황한 느낌을 주는 구석도 보이나,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저자만의 구성과 해석은 새롭다. 덤으로 후주와 찾아보기를 넘겨보는 재미도 (그리고 분량도) 만만치 않다. 아마도 자신이 천재라면, 아니면 부모의 처지에서는 내 아들, 딸만이라도 천재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그런데다 모 기업 CEO의 소위 천재경영론, 천재 한 명이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어쩌면 요즘에는 이것을 천재의 현상적 정의로 삼아도 되겠다). 그야말로 천재가, (이 표현에 신성함을 느껴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영재가 화제다. 인류사에 소중한 지적 자산을 안겨준 천재 물리학자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전언하는가? 파인만과 같은 거인들의 천재성, 창조성에 얽힌 비밀을 한층 더 파보고 잘 알게 된다면, 그렇다고 누구나 다 또 그런 천재가 되라는 법은 없겠으나, 적어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학술적으로, 사람살이의 모든 면이 급변하는 불확실한 이 시대에 정녕 필요한 창의력과 상상력, 열정과 유연함, 현명함을 겸비한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한 첫 단추만은 제대로 끼우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