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시작되는 특별한 순간
--- 이지영 (blog.yes24.com/jylee721)
며칠 전,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두 남녀를 보고 웃은 일이 있다. 춥고 어두운 밤거리, 휘황한 불빛을 뚫고 달리는 연인의 모습. 멋졌을까? 아니, 코믹했다. 기대와는 달리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움켜쥐지도,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지도 않았다. 꽤 무서웠을 텐데도 몸을 한껏 뒤로 뺀 채 오토바위 좌석을 움켜쥔 여자.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남자. 남자의 헬멧 뚜껑을 들추면 부루퉁한 표정의 얼굴이 나올 것 같았고, 여자의 머리 위로는 이런 말풍선이 그려졌다.
'흥! 내가 네 허리를 잡을 줄 알고? 바빠서 탄 것뿐이니까 착각하지 말라구!'
둘의 사정은 난 모른다. 원수지간이었을지도 모르지. 그저 함께 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떨어져 앉는 둘의 모습이 상상력을 자극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은 눈길을 끄는 데가 있다. '저 둘은 왜 저렇게 떨어져 앉았을까'라는 호기심에 한번 더 돌아보게 된다. 로맨틱 코메디가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티격태격하는 남녀를 그린 '로맨틱 코메디'는 사실 세상에 널렸다고 봐도 좋다.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눈치만 보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이야기의 원조(?)라고 하면, 올해 영화로도 개봉된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 작품의 커플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나에겐 <전망 좋은 방>의 루시가 더 기억에 남는다.
<전망 좋은 방>은 20세기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E. M. 포스터의 초기작이다. 규율과 원칙을 중시하는 가정 교육을 받고 모범적인 숙녀로 성장한 여자가 여행 도중 만난 남자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이 사랑임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이야기. 그렇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감정의 떨림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름답고 특별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포스터의 소설보다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영화 <전망 좋은 방>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화면을 가득 채웠던 '햇빛'이다. 봄의 햇살 속에 빛나는 아름다운 풍경과 아름다운 두 남녀.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밝고 따스해지는 영화다.
책에서도 그러한 밝고 따스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처음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의문도 들었다. 게다가 사람 심리가 먼저 본 것, 먼저 알게 된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 않나. 그러나 이 작품은 예외였다. 먼저 본 영화나, 나중에 본 책이나,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큼 좋았다.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미묘하게 끌리기 시작한 그날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둘은 이미 펜션 근처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는 강둑 난간에 두 팔꿈치를 기댔다. 그러자 그도 그렇게 했다. 같은 자세가 된다는 것은 때로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영원한 우정을 암시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팔꿈치를 조금 움직이고서 말했다.'
여자가 팔꿈치를 난간에 기대자 남자도 따라서 팔꿈치를 난간에 기댄다. 무의식중에 둘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여자는 그런 상태가 어색해서 팔꿈치를 조금 움직인다.
이 별 것 아닌 장면에서 나는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그들도 깨닫지 못한 순간, 깨닫지 못한 감정을 포착한 작가의 시선이 좋아서, 이 장면은 내가 포스터를 좋아하기로 결심한 '별 것 아닌 순간'이기도 하다.
포스터는 이 작품 외에도 <모리스>, <인도로 가는 길>, <하워즈 엔드> 등 여러 편의 걸작을 남겼다. <인도로 가는 길>은 타임이 선정한 100대 현대 영문소설 중의 하나이고, <모리스>는 지금도 여전히 파격적인 소재인 동성애를 다룬 소설이다. 그의 작품이 읽히지 않은 채, 영화의 원작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 속에 시대의 모순을 담아내고, 보잘것없는 순간을 사랑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변화시키는 그다.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은 재미있다. 붙어 있지만 고집스럽게 떨어져 앉는 남녀의 감정을 포스터만큼 섬세하게 묘사한 작가도 드물다. 그의 소설이 <오만과 편견>만큼 '로맨틱 소설'의 고전으로 보다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