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탄생, 로마와 기독교의 만남
이 책은 단순한 교회사 연구물이 아니다. 기독교를 변증하거나 선교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진 책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류 문명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기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나름의 입장을 전개해 나간다.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넓고도 깊은 지적 능력을 자랑하며 역사의 매순간마다 개입하여 그 속에서 기독교가 무슨 역할을 했고 어떠한 영향력을 주고받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더 나아가 문명과 정신사에 관심이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기독교 없는 인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인류 없는 기독교 또한 생각할 수 없다.
폴 존슨은 특히 로마와 기독교의 만남을 아주 흥미롭게 추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지중해 문명(로마)의 지식인들은 지역신, 민족신에서 벗어나 삶의 공포로부터 위로와 보호를 약속할 수 있는 보편신이자 유일신을 찾고 있었으며, 바로 이 때에 전능한 유일신을 믿으며 내세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기독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미 2천 년 전부터 유일신을 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유대 민족에 국한된 민족신이자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르는 지역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예수의 가르침은 한편에서는 유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기독교가 자신의 모태인 유대교를 떠나 헬레니즘의 옷을 입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당시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나타난 치열한 역사의 결과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흡수될 것인가? 아니면 유대교와 완전히 결별하게 될 것인가?
헬라(그리스)인들과 같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를 두고 열렸던 기독교 최초의 정치행동인 ‘예루살렘 사도회의’로부터 이 책은 시작되고 있다. 왜일까? 기독교는 탄생된 그 시점부터 자신의 모태인 유대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예루살렘 측과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에 한정되어 있지 않기에 유대교와의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는 바울 측의 치열한 투쟁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바울이 승리하여 기독교는 보편종교가 되어 세계의 문명과 조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예루살렘 측이 승리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파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기독교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인류 문명에 있어서도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교황이 로마 가톨릭의 수장이 될 수 있었을까?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어찌하여 로마에서 꽃을 피웠고 로마의 감독이 가톨릭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이 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복잡하게 전개되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초창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유대교에 흡수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반(反)로마 유대인 투쟁가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로마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예루살렘을 황폐화시켰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중심세력이었던 유대 기독교가 몰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를 계승하겠는가? 다행히 그들에게는 바울로 대변되는 디아스포라(離散 유대인) 기독교세력이 있었다. 자연스레 디아스포라 기독교세력이 패권을 잡게 되면서 이방 선교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가장 중요한 사도로 평가받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인 로마가 자연스레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특히 로마 감독은 ?마태복음」 16장 18~19절을 토대로 소위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자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되는 주인공임을 내세워 베드로의 대리자인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위권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자연스레 교황이라는 자리가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 문명과 함께 한 기독교
이 책이 무엇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유럽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 또 이와 반대로 유럽 문명은 기독교가 만들어지는 데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한 상호작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폴 존슨은 로마 제국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등장하기까지 유럽의 문명은 기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구조로 형성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의 상호견제, 긴장, 갈등, 대립의 국면들과 비교해보면서 이 점을 박진감 넘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는 핍박의 종교에서 권력의 종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박해를 받아오던 기독교가 자리를 바꾸어 다른 이방 종교를 박해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기독교는 민족적인 이익을 좇기보다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종교였기에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로마의 목적이나 요구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로마 제국의 힘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에서 기독교라는 젊고 역동적인 파트너를 로마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바로 이 지점에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의 현실적인 논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는 유럽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삶의 모든 측면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교회 내에서도 감독과 교황이라는 독특한 성직자계급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분열을 지양하고 교리를 법제화하며 선교지역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독교 또한 여러모로 로마 제국을 닮아갔던 것이다.
세속권력과의 쟁투와 인문주의자들의 등장
8세기에 있었던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식은 기독교와 세속권력이 어떻게 손을 잡게 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지지기반이 사라진 교황은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던 프랑크 제국의 황제 샤를마뉴에 주목하게 되었고, 샤를마뉴 또한 로마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통로임을 자임하던 로마 교회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교황과 황제는 서로에게 등을 돌렸으며, 그 이후의 역사는 이 두 세력의 대결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세속의 검(세속권력)과 영적인 검(교회) 모두를 지도할 수 있다고 자임했던 것에 비해 황제들은 교황이 감독들의 수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 샤를마뉴로부터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이르기까지 황제들은 자신을 고위 성직자로, 교황들은 자신들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권한을 쥐고 있다고 여겼다. ‘샤를마뉴의 대관식’이 왕과 교황이 서로의 이익이 위해 만났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는 이 두 세력의 균형이 깨졌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세속권력과 교황권의 대결이라는 장에 새로운 권력이 나타났다. 인문주의자들인 이들 세력을 폴 존슨은 ‘제3권력’이라고 명명한다. 평신도와 성직자를 철저하게 구분하였던 교회에서 평신도신학자들, 즉 제3권력은 결코 용인할 수도, 함께할 수도 없는 세력이었다. ‘종교혁명’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하나의 교회를 꿈꾸던 기독교가 동?서교회의 분열에 이어 프로테스탄티즘과의 분열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제3권력의 등장으로 위축된 교황권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부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나폴레옹에 의해서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자신의 파트너로 삼았고, 이로 인해 몰락해가던 교황의 권위는 순식간에 회복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합리주의 실험의 실패와 지적인 불가지론의 등장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은 위기를 맞게 되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요새처럼 우뚝 솟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교황이 다시 유럽 역사의 무대에 강력한 세력으로 재등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대결사
?2천 년 동안의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기독교와 인류 문명과의 만남 외에 정통과 이단이라는 대결구도로 기독교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헤브라이즘(유대교)과 헬레니즘(로마)이라는 거대한 세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다. 더군다나 1~2세기 지중해 중부와 동부에서는 수많은 종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선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기에,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독교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 즉 가톨릭(그리스어로 ‘보편적’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교회는 기독교의 생존방식이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출발부터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기본적인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서조차 일치되지 못했으며, 2세기가 지나갈 때까지도 영지주의적인 성향이나 은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기독교는 전통 교회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처단하려 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에서 적그리스도요 첫 번째 이단으로 지목되었던 인물이 ‘바울’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유대 기독교인들은 바울 신학과 기독교의 헬라화를 반대하기 위해 이단사상을 도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 신학이 기독교의 최종 승자가 되면서 오히려 화살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하나의 목소리, 즉 정통주의를 지키려는 목소리와 이를 거스르려는 이단의 목소리는 2천 년이 흐르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 항상 함께 했다. 에우세비우스에 의해 기독교는 사도들로부터 정통성의 기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정통의 기반이 되었던 사도 기원사상이 실은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차용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감독제도가 확립되자 교회의 통일성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오리게네스가 성직자계급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이론적인 작업을 했다면,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으로 오직 하나이며 나누어질 수 없는 보편적인 공동체라는, 교회의 제도화를 이루는 데에 한 몫을 했다.
교회가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는 정경화와 감독제도를 바탕으로 한 정통주의 신앙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신앙형태를 구축한 것이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였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감독이 선출되는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감독에게 죄사함의 권리를 부여한 정통 교회와 결별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부터 교회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가톨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교회의 보편성, 언어와 문화의 통일성, 지역과 인종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성 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이 도나투스파 사건이다. 성직자의 정당성과 유효성을 외친 정통 교회에 반대하여 도나투스파는 자격 없는 성직자는 언제든 그 직책이 무효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와 같이 정통 교회에 저항한 세력은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카타리파와 같은 소종파들은 부패한 성직자들을 엘리트로 교체하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자유신령파라고 불리는 율법폐기론자들이나 천년왕국설의 평등사상에 기초하여 성직주의와 정통 교회를 공개적으로 공격하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라틴어와 성경을 접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저항세력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톨릭의 정통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거나 자신들끼리 소규모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 세력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의 교회, 보편적인 교회를 꿈꾸어왔으나, 불행히도 2천 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는 정통과 이단의 대결로 점철된 그리하여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하여 왔던 역사였다.
가톨릭과 모더니즘
정통과 이단의 대결만큼 흥미로운 대결의 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세속세상을 바라보는 교황들의 입장 차이이다. 특히 근대에 들어 교황들은 과학, 즉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모더니즘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배격할 것인가?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톨릭교회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교황(레오 13세)이 있었는가 하면, 철저한 흑백논리를 통해 미국적인 이데올로기나 모더니즘을 교회의 적으로 간주하였던 교황(피우스 10세)이 있었으며, 이와 반대로 교회예전이나 헌신생황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적인 모습을 보인 교황(요한 23세)도 있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요한 바오로 2세와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베네딕투스 16세를 비교해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가장 아이러니컬한 사건, 십자군전쟁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숱한 화제를 낳은 사건은 바로 십자군전쟁일 것이다. 이슬람세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하겠다는 신앙의 힘으로 일으킨 전쟁이라는 시선이 있는 반면, 잔인한 살육을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전쟁이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객관적인 기록을 토대로 십자군 전쟁의 원인을 다음의 세 가지로 분석해놓고 있다. 첫 번째로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소규모로 전개되었던 성전이 발전된 것이라는 것, 두 번째로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경비군이 확대되었다는 것, 세 번째로는 당시 유럽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라 발생한 토지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벌인 식민지 전쟁이라는 것이다. 폴 존슨은 무엇보다도 십자군들이 종교나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과 약탈을 자행했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아니 십자군은 심지어 라틴계 기독교를 제외한 모두를 가차 없이 살해하는 극도로 배타적인 폭력집단이었다. 특히 권력자에게는 새로운 영토에 대한 야망이나 경제적인 욕망을,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개인적인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애초부터 이 전쟁은 타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 - 양심의 명령을 따른 종교
이 책에서는 기독교의 실패와 단점, 그리고 기독교 제도의 왜곡된 점들 또한 강조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정경유착, 배타적인 근본주의가 저지른 만행들(십자군 운동, 종교재판, 마녀사냥 등), 분열과 갈등(동?서방교회의 분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 등), 일부 성직자들의 비-윤리적인 관행과 행태들(수도원의 재산권 확보, 성직매매 등) 등 기독교의 그늘진 모습들을 숨기거나 정당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밝혀내서 기독교 본래의 모습과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로마 문명을 유럽 곳곳으로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점이다. 중세 내내 기독교는 로마화를 의미하였고, 로마화는 문명화를 전제하는 것이었으며, 이 모든 것은 로마 가톨릭 정통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폴 존슨은 기독교가 인류에게 주었던 가장 큰 덕목을 ‘불멸의 소망’이라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개개인에게 양심을 심어주어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사회는 전제정치와 강압적인 사회에 끊임없이 저항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기독교가 만들어냈던 제도적인 전제정치를 파괴하였던 것도 기독교의 양심, 즉 자체 교정능력을 통해서였다.
기독교 또한 대학살과 고문, 편협성과 파괴적인 교만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역동성이 없었다면 지난 2천여 년의 역사는 훨씬 더 무시무시했을 것임을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가 모든 인류를 안전하거나 행복하게 혹은 위엄 있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으나, 기독교는 분명 인류에게 ‘희망’을 심어준 종교였다.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까지 세세히 분석하면서, 그에 맞물린 지난 2천 년 동안의 인류의 정신을 톺아내고 있는 이 책은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는 지금,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인문학도들이 한번쯤 숙독해야 될 책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