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정말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는 살아 계시고, 친구들도 존재하고, 그는 콧수염을 깎은 것이다. 이걸 인정하면 다른 두 번째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아네스가 미쳤다는 가정이었다.
--- p.
그는 박혀 있던 면도날을 뽑았다. 기운이 빠져서 면도칼을 목에 갖다 댈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성공했다. 비록 행동에 힘이 달리고 온몸에 일던 강직성 경련이 팔을 빠져 나가긴 했지만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느낌조차 없는 상태에서 칼을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움직이며 턱 아래를 잘랐다.
--- p.220
그녀는 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걸까? 그가 자신을 놀래 주니까 다른 비장의 무기로 대응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바로 그게 놀라 웠다. 그녀는 전혀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는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단 1분 1초도 보지 못했다. 그는 판을 다시 재킷에 넣으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마치 그런 장면을 여유 만만하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썹한번 찡긋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이라도 표시가 난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 p.19
그가 두 사람의 공통된 기억. 어떤 사람 혹은 물건에 대해 아무 뜻 없이 언급할 때 아네스가 창백해지면서 입술을 깨물고 한참 말이 없는 것만 봐도 <또 시작이구나>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다시 와해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지뢰밭 위에서의 생활, 언제 다시 우르르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채 더듬더듬 앞으로 나가는 생활, 이런 생활을 어느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 p.168-167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작년에”
그녀가 말했다.그는 황망해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게 놀라웠다. 이번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은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기억 상실을 다시 한번 확인 - 물론 이것도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 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실제로는 1년 전부터 아버지를 뵌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에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는 지난 일요일에 했던 점심 식사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날 응답기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말이다. 자신이 지워 버린 그 목소리 말이었다.
“어떡해.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
--- p.127
“10분 전에, 점심 먹으러 못 간다고 당신이 우리 부모님한테 분명히 전화했지?”
그는 그녀의 망설임을 감지했다.
“어머님한테. 응”
“다른 일요일처럼 이번에도 우리 부모님 댁에 점심 먹으러 가기로 돼 있었지. 맞아?”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작년에”
그녀가 말했다.
그는 황망해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게 놀라웠다. 이번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은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기억 상실을 다시 한번 확인 - 물론 이것도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 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실제로는 1년 전부터 아버지를 뵌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에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는 지난 일요일에 했던 점심 식사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날 응답기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말이다. 자신이 지워 버린 그 목소리 말이었다.
“어떡해.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
아네스가 그의 어깨 위에 머뭇머뭇 손을 얹으며 웅얼웅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차마 삭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그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p.127-128
"아네스가 전화를 해서 혹시 너한테 이런 얘기를……."
그는 망설였다.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다고?"
"어, 너한테……."
그는 눈 딱 감고 말했다.
"너한테 내가 한번도 콧수염을 길러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려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제롬이 입을 뗐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한번 분명히 짚어 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콧수염을 깎은 걸 너도 분명히 봤을 것 아니야."
이상하게도, 그가 방금 전에 콧수염을 복수로 쓴 것 때문에 제롬이 놀란 모양이었다. 제롬은 꿈속에서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pp.113~114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작년에”
그녀가 말했다.그는 황망해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게 놀라웠다. 이번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은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기억 상실을 다시 한번 확인 - 물론 이것도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 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실제로는 1년 전부터 아버지를 뵌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에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는 지난 일요일에 했던 점심 식사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날 응답기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말이다. 자신이 지워 버린 그 목소리 말이었다.
“어떡해.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
--- p.127
“10분 전에, 점심 먹으러 못 간다고 당신이 우리 부모님한테 분명히 전화했지?”
그는 그녀의 망설임을 감지했다.
“어머님한테. 응”
“다른 일요일처럼 이번에도 우리 부모님 댁에 점심 먹으러 가기로 돼 있었지. 맞아?”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작년에”
그녀가 말했다.
그는 황망해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게 놀라웠다. 이번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은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기억 상실을 다시 한번 확인 - 물론 이것도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 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실제로는 1년 전부터 아버지를 뵌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에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는 지난 일요일에 했던 점심 식사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날 응답기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말이다. 자신이 지워 버린 그 목소리 말이었다.
“어떡해.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
아네스가 그의 어깨 위에 머뭇머뭇 손을 얹으며 웅얼웅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차마 삭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그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p.127-128
"아네스가 전화를 해서 혹시 너한테 이런 얘기를……."
그는 망설였다.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다고?"
"어, 너한테……."
그는 눈 딱 감고 말했다.
"너한테 내가 한번도 콧수염을 길러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려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제롬이 입을 뗐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한번 분명히 짚어 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콧수염을 깎은 걸 너도 분명히 봤을 것 아니야."
이상하게도, 그가 방금 전에 콧수염을 복수로 쓴 것 때문에 제롬이 놀란 모양이었다. 제롬은 꿈속에서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pp.11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