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어느 날 아침, 한 남자가 여덟 살배기 소년을 데리고 와서는 연주를 들어달라고 청했다. 아이는 얼굴이 창백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피아노 의자에 쏜살같이 달려간 다음에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고 저러다가 피아노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게 아닌가 가끔씩 걱정도 되었다. 아이의 연주는 체계가 없었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놀라웠으며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아이에게 초견 연주를 시키고 보니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22p, 제1장 신동에서 순회연주가가 되기까지 중에서 스승 체르니의 말

모차르트 일가의 순회연주를 재현하듯 리스트는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슈투트가르트, 스트라스부르에서 잇달아 공연을 열었다. 그때 리스트는 고작 열두 살에 불과했던 소년이었지만 비공식적이나마 제국의 대사 같은 대접을 받았다. 28p, 제1장 신동에서 순회연주가가 되기까지 중에서

리스트는 쇼팽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봤고 동료로 대하며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폴란드 출신인 쇼팽이 살롱계에서 살 길을 마련하도록 애썼다. 살롱은 각기 다른 이유로 두 사람 모두에게 적합한 곳이었다. 리스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찬사를 누렸고, 쇼팽은 품위 있는 환경이 자신의 시적 음악성에 적합하다고 느꼈다. 34p, 제1장 신동에서 순회연주가가 되기까지 중에서

파리 음악계에 재능 넘치는 이들이 많았지만, 아직까지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리스트는 자신이 그런 인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를 가둔 채 몇 주 동안 혹독하고 어려운 기교 연습에 매진했다. 파가니니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인 기상곡Caprices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동형진행을 연주하기가 대단히 힘들어 나중에 개작할 때는 단순하게 바꿨다). 38-39p, 제1장 신동에서 순회연주가가 되기까지 중에서

고작 13세에 불과한 작곡가가 기존 오페라를 참고해서 그만한 기법으로 소화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서 파리 시절 리스트의 작곡 선생이던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가 쓴 곡이라는 악성 루머까지 널리 퍼질 정도였다. 84p, 제2장 건반 위의 사자 중에서

카롤린은 영감과 기지, 융통성까지 있었고 소유욕이 두드러지긴 해도 헌신적이었다. 마리 다구의 경우 유머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카롤린은 기분이 좋을 때는 한껏 자유분방하고 친밀함을 물씬 뿜어내는 성격이었다. 자제한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늘 장난꾸러기였던 리스트는 그런 카롤린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90p, 제3장 바이마르 시대 중에서

카롤린이 보기에 리스트의 매력은 카리스마와 재기를 겸비한 잘생긴 예술가인 데다 느닷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그도 자신처럼 독실한 가톨릭교회 신자라는 점이었다. 이 사랑의 방정식에서 더욱 놀라운 점은 리스트가 꼽은 카롤린의 매력이 같은 종교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90p, 제3장 바이마르 시대 중에서

리스트는 19세기 ‘낭만주의 전쟁’의 선두에 나섰는데, 자신과 바그너는 진보적인 진영이고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는 보수적 낭만주의 진영이었으며 이들은 서로 맞섰다. 103p, 제3장 바이마르 시대 중에서

리스트는 미술과 문학에서 더 심오한 영감을 받았다. 1858년에 그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공연을 보고 고뇌에 찬 반영웅의 고결하고 확신에 찬 자화상을 동명의 교향시로 그려냈다. 152p, 제4장 예술과 시 중에서

베토벤 교향곡 편곡에서 존경스러운 부분은 원곡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상에서 효과적인 기법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교향곡 9번이었는데 수준 높은 주제 전개와 독창 및 합창의 결합 때문이었다. 리스트는 예전에 이 모든 것을 표현하려면 피아노가 두 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851년의 전작에서는 그렇게 편곡했다. 196p, 제6장 로마와 세계에 중에서

지휘는 한스 폰 뷜로가 맡았다. 그때부터 리스트는 뷜로의 아내이자 자신의 딸인 코지마가 벌인 바그너와의 비밀 연애에 휘말렸다. 하지만 딸 가진 아버지라는 입장에서 반대와 우려를 표했을 뿐 그 어느 때보다도 원숙해진 바그너의 천재성은 계속해서 높이 샀고, 그 응답으로 피아노 편곡 작품 중 최고의 작품까지 내놓았다. 196-197p, 제6장 로마와 세계에 중에서

리스트가 정기적으로 교습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제자들이 바이마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식목원 속 작은 집의 분위기는 알텐부르크 시절에 비하면 편안하지 않은 편이었다.

이제는 리스트도 나이가 들었다. 신경질이 늘었고 유머감각은 들쑥날쑥했다. 게다가 전보다 훨씬 브랜디와 시가를 애용하여 늙어버린 몸을 지탱하려 했다. 하지만 전과 같이 자신을 숭배하는 분위기를 연출해 자기중심적인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다. 여전히 고집스럽게 교습비는 받지 않았다. 자신과 제자들의 나이 차이를 감안해도 교습 분위기는 동료 예술가들의 관계와 흡사했다. 213p, 제7장 세 갈래의 삶 중에서

리스트가 걸었던 창작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820년대에 파리에서 쓴 최초의 피아노 연습곡은 서정적이고 초기 낭만주의 양식으로 당대의 흐름과 일치하지만,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과 메마른 뼈들 같은 작품은 20세기 음악의 문턱까지 넘본다. 말년에 작곡한 가수와 피아노를 위한 가곡(둘 다 마리 공주에게 헌정)은 소규모이지만 듣고 나면 잊기 힘들 정도로 그가 걸어온 여정의 막대한 흐름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264p, 제8장 미래를 향해 던지는 창 중에서

이제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행복한 기분으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카미유 생상스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세상은 그를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마지막까지 우겼지만 이는 틀렸다. 그는 가장 뛰어난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265p, 제8장 미래를 향해 던지는 창 중에서

중년과 노년에 걸쳐 오랫동안 그는 무심한 성인santa indifferenza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프란체스코회 출신의 작곡가답게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공개 논쟁은 일상적인 일인 듯 제쳐둘 만큼 세상을 많이 알았다. 271p, 에필로그 중에서

압권은 만년의 피아노곡들인데, 진보적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로 근대를 예감하는 듯한 음악이다. 리스트는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에게 “한계 지점이 없는 미래를 향해 창을 던지고 싶었다”고 전한 바 있다. 276p, 에필로그 중에서

<B>전설적 피아니스트에서 위대한 작곡가로 남은</B><br/><B>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삶과 음악</B><br/><br/>‘피아노의 신’이라는 명성을 얻은 전설적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던 천재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의 삶과 작품세계를 ‘우리가 사랑한 음악가 시리즈’ 15번째 책으로 만난다.<br/><br/>이십 대와 삼십 대 초에 유럽 전역을 순회 연주하며 기교의 대가로 군림했던 리스트. 그는 당시 한창 발전 중이던 새로운 건반악기 피아노의 음악적 가능성을 극대화하여 음악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연주자로서의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재능은 물론 마법 같은 음악성과 인간적인 매력까지 겸비하여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다. <br/><br/>그러나 흔히 알려진 삼십 대까지의 화려한 삶은 이 거대한 음악가의 극히 일부분으로, 그가 남긴 업적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평가 받고 있지 못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작곡가들 중에서도 유독 자유로운 영혼을 굳이 특정 범주로 분류할 필요가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 시도에 숨은 의중은 사실 리스트가 ‘너무 쉽게 작업했다’는 데 있다”고 그의 편에서 이야기한다.<br/><br/>리스트는 놀라울 정도로 다작을 한 작곡가로서, 자신의 곡뿐만 아니라 다른 작곡가의 음악도 이따금 다소 충동적이었을 망정 훌륭히 옮겨 적고 편곡했다. 그의 초기 피아노 음악은 거의 다 추후 개정을 거쳤고, 판본이 여러 개인 작품도 수십 편이다. 단테 교향곡 파우스트 교향곡을 비롯해 독주곡 헝가리 랩소디, 교향시 마제파 타소 비탄과 승리 등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섭렵했던 그는 단악장 소나타 형식을 개척하고 현대적 피아노 독주회 형태를 대중화시켰으며, 연주 기교보다 작품 해석에 집중하는 마스터클래스를 처음 시도하고 새로운 장르인 교향시를 창시하여 관현악 분야에 혁명을 일으키는 등 음악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br/><br/>또 음악적 후원자로서 베를리오즈, 쇼팽, 바그너의 음악을 알리고, 자신에 대한 계속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 슈만을 도왔으며, 열정적 교사로서 500명 이상의 후진을 기르는 한편, 만년에는 신부가 되어 대단히 진보적인 기법으로 피아노곡, 합창곡, 종교곡 등 수많은 곡을 썼다.<br/><br/>이 책은 리스트의 다양한 음악적 성취뿐만 아니라 오랜 인연을 유지한 마리 다구와 카롤린 공작부인과의 사랑, 딸인 코지마와 얽힌 한스 폰 뷜로와 바그너의 갈등, 그리고 당시 피아노의 발전 과정 등 흥미로운 읽을거리로 가득하다. 음반 2장과, 부록에 실린 음반 수록곡 해설, 책 속 등장인물 소개, 음악 용어집, 리스트 생애 비교 연표 등을 통해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피아노 신동 중 한 명에서 예지 넘치는 음악가이자 재능 있는 작가, 낭만적 몽상가로 남은 한 비범한 예술가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