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나 네가 이 세상의 중심부이니라'.'
'이제 내려가는게 좋겠어요.'
아이가 재촉하듯 말했다.
'내려가지 않는다.'
노스님의 답변이었다.
'정말로 여기서 살 건가요.'
'그렇다.'
'여긴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옷도 없잖아요.'
'좋은 암자에 좋은 시자에 염화시중의 미소까지 간직했나니 중으로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온르부터 너는 내 밑에서 태함산 전체를 암자로 삼아 불법을 공부하게 될 것이니라.'
노스님은 말을 마치자 무심히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달은 이제 하늘 중천에 높이 떠 있었다. 건너편 산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부엉이가 울고 있었다. 솔잎이 소리 없이 지고 있었다.
--- p.293-294, p27, pp1-14
''불난 집에 가보면 어떤 경우에든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체들의 잔해나 재의 형상들이 불난 곳을 가리키며 쓰러져 있네. 경험에 의해서 터득된 재주지만 자연의 법칙일세. 아무도 부인할 수 없지. 자네 눈으로 한번 자세히 살펴보시게. 바로 저기에 남포가 쓰러져 있는 것을 지팡이로 뒤적거려 찾아내었다네. 타다 만것들이 모두 저곳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정말이었다. 제일 먼저 타버린 것들부터 차례로 쓰러져서 그을리거나 재가 된 채로 농월당부인이 지팡이로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누적되어 있었다.
--- P.83
네 할아버지께서는 세상 만물 중에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아닌것이 없다고 말씀 하셨느니라.아주 작은 먼지 한 점 조차도 우주의 절대적 요소중 하나라고 말씀 하셨어.허나 그런 사실을 실감 하려면 우선 마음으로써 모든 사물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하느니라.
--- p.85
그의 외모는 매우 특이하였다. 백발동안-얼굴은 귀공자처럼 해맑은데 머리카락은 고희를 넘은 노인처럼 온통 된서리가 하얗게 얹혀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제나 등에 둥글고 기다란 금빛 비단통 하나를 둘러메고 있었다. 홍콩영화의 액션물에 나오는 현대판 칼잡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전혀 살벌해 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 p.
'그런데 자네가 등에 메고 있는 그 통 속에는 도대체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가.'
'그림이 한 폭 들어 있습니다.'
'왜 그걸 메고 다니는가.'
'이 그림은 제가 어릴 때 오학동梧鶴洞이라는 마을에서 얻어 온 그림인데 이 그림 속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다시 제가 오학동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버린 것도 오학동을 다녀오고 나서부터였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오학동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 p.13
' 무슨 시계가 바늘이 없는가.'
무심코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던 노파가 대학생에게 물었다.
'디지날 시계라는 겁니다.'
'돼지털 시계라니.'
'돼지털 시계가 아니라 디지털 시계입니다. 바늘 대신 숫자로 시간을 알려주는 최신형 시 계죠. 일류병에 걸린 우리 아버지가 사다주신 시계입니다. 우리 집안 식구들은 무엇이든 일 류가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만 삼류입니다. 삼류 중에서도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있는 삼류죠.'
자조하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보기에는 삼류蔘類는 삼류인데 산삼류山蔘類일세.'
노파의 위로였다.
--- p.16
' 네 할아버지께서는 세상만물 중에서 아무리 하챦아 보이는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아닌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느니라. 아주 작은 먼지 한 점 조차도 우주의 절대적 요소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어. 허나 그런 사실을 실감하려면 우선 마음으로써 모든 사물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하느니라. 그리고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낮추어서 바라보아야 하느니라. 흔히 사람들은 개나리 진달래 꽃다지 민들레가 봄에 핀다는 사실들을 잘 알고 있지. 허나 그것들이 겨우내 얼마나 간절하게 햇빛을 그리워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를 잘 모르고 있어. 마음을 닫아 걸고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지.'
---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