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내 주변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눈두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뜨거운 무엇인가가 얼굴에 사선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 맑고 뜨거운 물줄기,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언젠가 뮤의 여자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들의 속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것일까.
--- p.117-118
늦여름 비가 내리던 밤, 나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그리고 벽면에 붙여둔 세계지도의 한 지점을 올려다보며 비장한 결심을 했다. 내가 가고 싶어한 장소를 모조리 부정하고 내가 가야 할 장소를 가까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내가 가고 싶어한 곳은 멕시코, 서사모아, 그리스, 알제리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곳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수직 하강선의 마지막 지점, 형의 행적이 최종 확인된 아프리카 대륙의 짐바브웨였다. 그곳이 현실과 단절을 꾀할 수 있는 결정적 포인트, 모든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짐바브웨 버드.
마음의 행로를 정하자 퍼드덕,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새 한 마리가 세찬 날갯짓을 하며 되살아났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래오래 내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내 자신과 형을 분리시키고 싶어한 은밀한 타인의식의 상징처럼 지난 구 개월 동안 내 서랍 속에 숨겨져 있던 짐바브웨 버드-그것은 작년 여름, 짐바브웨 원주민들의 돌조각을 구입해 전 세계에 판매하고 있는 형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형에게 보내준 것이었다. 11~15세기에 있었던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석조 유적지에서 발견됐다는 새 모양의 돌조각.-이걸 보고 있으면 내가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것이 만들어지던 시대, 이런 것이 만들어지던 공간은 어떤 곳이었을까?
--- pp.116-117
가끔 당신의 침묵 속에서 말라죽는 상상을 합니다. 어떤 때는 당신의 침묵 속에서 화형 당하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말없이 순응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 사랑의 언어를 기다리며 한 생애를 보내는 일이 어찌 무익하기만 하겠습니까. 사랑한다는 말의 씨앗을 심고, 사랑한다는 말의 결실을 거두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미 몇 번의 생애가 그렇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괜찮다고, 운명의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아무리 길게 써도 끝나지 않을 편지, 아무리 길게 써도 한 줄로 요약될 편지...... 딱딱하게 여문 말의 씨앗 한 톨을 편지에 담아 발송합니다. 이 씨앗이 부디 당신의 침묵 속에서 구원의 싹을 틔울 수 있기를 빌며.
--- p.96
7월 무더운 어느 날, 특급 열차가 서지 않는 간이 역사의 공중 변소로 한 소년이 들어섰다.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발목이 부러질 정도의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평소 30분이면 충분할 거리가 오늘은 두 시간 넘게 걸렸다. 걸어오는 동안 햇빛을 피할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양어깨에 나눠 짊어진 배낭 세 개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하루 종일 햇빛에 달았을 슬레이트 변소 안에 후끈한 열기와 썩는 내가 고여 있었다. 비위가 상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은 끈끈한 실을 턱에 달고 운동화 등으로 떨어졌다.
여섯 개의 문 가운데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오줌 버캐가 누렇게 낀 변기에서 악취가 났다. 소년은 노래를 불렀다. 꼬옻 피이는 동배액 서엄에 보옴이 와았거언만…… 세 개의 지갑에서 꺼낸 지폐와 동전을 챙겨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학생증에 붙어 있는 명함판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별을 매겼다. 김영미 별 두 개, 이민선 별 없음, 민소현 별 다섯. 민소현이라는 여자애의 사진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수입이 짭짤했다. 물론 발목만 다치지 않았다면 더더욱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예쁘게 접힌 은행잎만한 꽃무늬 팬티가 끌려올라왔을 때는 키득대면서 그곳에 얼굴을 묻고 세차게 부벼댔다. 세탁 비누 냄새가 좋았다. 팬티로 지갑을 돌돌 말아 오물이 넘치는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소지품은 많지 않았다. 카메라나 워크맨 같은 게 나와주면 금상첨화겠지만 현금보다는 성가셨다. 입술 연고는 쌀쌀해질 가을을 대비해 챙겨 넣었다.
배낭 밑바닥에서 개봉된 편지 봉투가 손에 잡혔다. 버릴까 하다 궁금증이 일었다. 밖은 아직 무더웠고 계집애들은 편지에 어떤 이야길 쓸까 호기심도 생겼다. 6월 23일자 소인이 박혀 있었는데 잉크가 번져 우체국 이름은 알아볼 수 없었다. 수취인은 김영미, 발신인은 최명희였다.
---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