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문과대 철학과와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동양증권과 대우조선 등에서 이십여 년 일하다가 미국으로 이민하여 18년간 페인트공과 세일즈맨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이후 귀국해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며 역사와 한시 등을 공부하고 있다. 본명은 나승호(羅承浩).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만 들리는 천만 리 외따로 떨어진 고도에 뜻을 잃은 한 사나이가 와 있었다. 대역부도의 죄인으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처자식도 모두 흩뿌려졌다. 부모형제는 연좌되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운명을 알 도리도 없었다. 마른 풀로 지붕을 인 누옥(陋屋)에서 단정히 책상 앞에 정좌하고 혼을 담아 한 자 한 자 글자를 써내려간다. 그 글자에서는 궁형(宮刑)을 당한 치욕을 견뎌내며 대나무 조각에 붓으로 한 자 한 자 원념(怨念)을 써내려간 천여 년 전의 사관 사마천(司馬遷)의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1권, 89~90쪽)
다음 장부터 서술되는 이야기는 백 년간 초당에 묻혀 있던 옛 기록에 빠져든 내 친구가 쓴 소설이다. 고균이 꿈꾼 새 나라가 어떻게 건설되었고, 그가 인민을 어떻게 보살피고 험난한 제국주의 시대의 격랑을 어떻게 견디어내며 국체를 온전히 보존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물려주었던가 하는 승리의 기록 《해빈록(海濱錄)》이다. 실패한 인간이 유배지에서 꿇어앉아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미래의 성공한 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고균이 그의 문집 속에서 환생하여 새 나라를 건설해나가는 나날을 지켜보게 되었다. (1권, 143~144쪽)
고균의 목표 중 하나인 조선의 중립국화도 대치의 사상에서 싹튼 이상이었다. 사실 이것은 어려울 것도 없는 결론이었다. 지금 조선의 형편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자력으로 자주독립할 수 없다. 그러면 열강 중 어느 하나의 속방이 되어야 하느냐?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스스로 힘을 길러 아무한테도 속박 받지 않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겠다. 그러니 우리는 중립국을 표방하여 우리의 독립을 유지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1권, 304쪽)
철도와 도로의 기공식으로 분망한 나날이 지나갔다. 고종은 입헌군주체제 아래서 군림할 뿐인 왕으로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근래 나라의 진로를 보니 자신이 그렇게 노심초사해가며 이루고자 했던 일들이 하나씩 성취되어 가는 데 대해 한편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일들을 젊은 개화파가 하나씩 성공해가는 데 대해 일종의 허망감, 질시, 모멸감 등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2권, 121~122쪽)
1902년. 아시아와 세계의 정세는 여전히 유동적이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 앞에 약소국의 앞날은 여전히 불안했다. 조선제국은 출범 이후 착실하게 국력을 배양해나갔다. 혁명 전의 전근대적인 관행들을 하나하나 철저히 개혁해나갔다.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한 조선으로서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유일한 살 길일 수밖에 없었고, 이런 자각에서 십여 년간 국력을 기울여 사람을 키워나갔다. 구미 열강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생이 거의 천 명에 육박하게 되면서 그들이 관계, 재계, 교육계, 문화계 등 각계의 지도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권, 244쪽)
황제의 속마음이 우러나는 피 끓는 조사를 듣는 제 대신과 광화문 앞 넓은 마당에 상복 입고 무리 지어 엎드린 백성들은 소리 높여 울부짖고 곡하며 고균의 넋을 떠나보냈다. 그때 삼천리강산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인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때는 1913년. 혁명을 이끌고 평생을 바쳐 조국의 발전에 골몰하던 고균은 예순셋 되는 그 해 봄에 그토록 그가 사랑하던 조국과 인민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집권 후 두 번째로 일본에 다녀온 직후였다. (2권, 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