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가 <오! 수정>에서 보여준 것은 바닥까지 닿는 자학 비슷한 모욕감이다. 성적 불안감, 망상증, 환상에 갇힌 남성의 자아와 그런 남자를 달뜨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허우적대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오! 수정>은 표명상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등장인물의 기억 조각을 따라 이야기를 재조립하면 이들의 넝마같은 진심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홍상수 영화는 늘 직접적인 대화 소통에 실패한 등장인물의 말장난을 구사했는데, 급기야 <오! 수정>에선 성교를 나누던 남자 주인공 재훈이 여자 주인공 수정이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어쩌면 의도'라고 생각하는 수정과 '어쩌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재훈의 기억의 편차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홍상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피곤하게 말 실랑이를 나누며 영원할 것 같은 기다림을 겪고 뜬금없는 말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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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미래는 결국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이 말했던 카메라 만년필설이 실현되는 지점과 엄청난 기술과 자본의 복합체인 할리우드 불록버스터가 맞서는 지점에서 흥미로운 꼴로 만들어질 것이다. 필름으로 찍는 영화의 미학은 낡은 것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영화는 어차피 근대기술의 산물이었고 시간의 동시성을 담는 20세기의 매체였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또다시 기술의 제약과 혜택을 받아 새로운 매체로 정의된다고 해도 그것은 매체의 운명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며 지금의 세상을 긍정하는 태도와 부정하는 태도의 싸움이다. 또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요동하는 욕망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언젠가 '열세살의 평범한 소녀가 아무 때나 쉽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비로소 영화는 예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사실 그런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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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타란티노의 영화는 로저 코만이 정착시켰던 B급 영화에 대한 향수, 무구한 오락에의 매혹과 성과 폭력으로 치장한 싸구려 영화가 안겨주는 일탈의 쾌감을 자극하는 뇌관을 품고 있다.
70년대 흑인영화 스타 팸 그리어를 주연으로 기용한 <재키 브라운>은 바로 그러한 B급 영화에 대한 충성의 재확인이자 고전적인 탐정영화 내러티브의 교묘한 변주이며 동시에 옛날 영화의 강고한 도덕과는 별로 상관없는 상대주의적 윤리를 설파한다. 이 영화에는 로버트 드 니로와 브리지트 폰다가 텔레비젼을 통해 한물간 70년대 싸구려 액션영화를 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한눈에 봐도 싸구려임이 분명한 그 영화는 피터 폰다가 74년에 만든 <더티 메리 크레이지 랠리>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옛날에 봤던 싸구려 영화의 원초적인 감동, 사랑, 성, 폭력과 그 밖의 금지된 것을 위반하고 싶은 충동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타란티노는 쓰레기 문화를 즐기고 포장해낼 줄 아는 마법의 손을 지녔다. 그의 영화는 내용 없는 스타일을 선정적으로 선전하는 쓰레기더미 같다는 비난을 종종 듣지만 사실은 B급 영화의 진정한 진취 정신을 몸에 붙이고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싸구려 영화의 무한한 자산을 왕성하게 섭취해 인간의 감정과 일상을 반영하는 도발적인 화술의 경지로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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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의 영화에서는 로저코만, 쿠엔틴 타란티노, <엘 마리아치>의 로버트 로드리게즈 등의 감독이 나누고 있는 유희를 향한 열정 같은 것이 풍겨나온다. 앞서 존재한 대중영화의 스타일과 내용을 인용하고 형식을 마구 뒤섞으면서 후안무치한 베끼기에서 이 시대의 대중문화적 코드를 멍석 펴듯이 깔아놓겠다는 징후인 것이다. 완성도와는 관계없지만 공식적인 미학 규범을 무시하거나 아예 의식하지 않는 천방지축의 패기가 보인다. B급 영화 정신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대중문화의 유산을 이리저리 횡단하고 받아들이면서 굳이 예술인 척하지 않고 이미 봤던 것을 다른 모습으로 가공해내고 거기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그것이 쌓이면 거대한 B급 영화의 만신전이 만들어질 것이다. 한국에서의 B급 영화는 이제 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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