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어떤 벌을 받든, 아들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다만 아까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세상의 균형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지금은 그렇습니다. 3년이 지나 그 여자를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마음속 어디선가 가해자인 그녀도 그 사고로 인생을 망치고, 낮인데도 밤 같고, 침대에서 자도 동굴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어둡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잔혹한 불균형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겁니다.”
--- p.92
만일 그때 소년에게 작은 칼을 돌려주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나는 상상해 보았다. 여자는 아직 살아 있고, 나는 형사의 차에 탈 필요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야 하는 사람은 신칸센 열차 운행이 멈추어도, 비행기가 날지 않아도, 차가 고장 나도, 어떻게든 찾아간다. 경로나 수단이 바뀌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 p.101
“카페에 가서 흔히 고민하잖아요. 생크림 케이크랑 몽블랑 중에 어느 걸로 할까.”
“나는 간식은 안 먹어서.”
구로사와의 대답에 와카바야시 에미는 벌렁 나자빠질 정도로 놀랐다가 그런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힐난하더니 “차라리 케이크를 주식으로 삼아 봐요”라고 했다.
“그래서?”
“그래서 예를 들어 생크림 케이크를 주문한 뒤에 만일 몽블랑을 주문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함께 간 사람이 몽블랑을 주문했다면 한 입 정도는 나눠 줄지도 몰라요. 아아, 이런 맛이었구나, 하고 아는 거죠.
“하지만 인생의 분기점에서는 불가능해. 누군가에게 그쪽은 어땠느냐고 물을 수 없어.”
“그렇죠. 또 하나의 인생은 맛볼 수 없어요. SF처럼, 뭐라고 해야 하나, 시공이 일그러지는 일이 없는 한은.”
--- p.122
“그래서 그걸로 끝이었다, 이거군.” 오늘은 조사 결과를 보고하러 왔는데, 이렇게 다시 개요를 확인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흘 동안 밤에만, 벤치에 앉아 두 시간쯤 이야기한 게 다예요.”
“도합 여덟 시간인가.”
“구로사와 씨, 제가 어리석어 보이죠?” 와카바야시 에미가 웃었다. “겨우 여덟 시간의 추억을, 50년 지난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다니.”
아니. 구로사와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본 육상 선수 칼 루이스의 100미터 달리기는 거의 10초밖에 안 됐지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 추억은 시간하고는 별 상관 없어.”
--- p.147
“가령 뮤엘러리에게 잔뜩 괴롭힘 당하던 다른 사슴벌레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하느님 도와주세요! 왜 구해 주지 않는 겁니까?’ 뒤집힌 사슴벌레도 그럴 겁니다. ‘어째서 제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나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이대로 꼼짝 못 하고 죽다니. 뭘 잘못한 겁니까?’”
“세상엔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다고 한탄하겠지.”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있어요. 옆방에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죠. 마음이 내키면 상자를 들여다보고, 그때 알아차리면 도와주기도 하고요.”
“나쁜 놈에게는 벌을 주지.”
--- p.216
[……] 사토 와타루가 입을 열었다. “전쟁이나 사건, 사고, 질병은 어딘가에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우는 부모들, 슬퍼하는 아이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 나지만 우리는 자기의 시간을,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일을 똑바로 완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기 생각만 하면 된다거나, 남의 일은 알 바 아니라고 개의치 않는 것과는 또 다르지만요.”
“야, 못난이,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기지마 노리코가 상대를 존중하는 건지 모욕하는 건지 모를 태도로 묻자, 사토 와타루는 싫은 내색 하나 비치지 않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니 여러 문제를 고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작곡가가 죽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악보를 필사적으로 연주하는 것밖에 모르고, 그럴 수밖에 없다. 옆의 악보를 훔쳐볼 여유도 없다. 자기 악보를 연주하면서 남도 제대로 연주하기를 바랄 뿐이다.’”
--- p.37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