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작쿵작. 공기주름통이 가슴에 닿자 마치 사람처럼 체온이 느껴졌다. 나비야, 나비야. 멕시코 삼촌이 무등을 태워주기 위해 나를 번쩍 들어올렸던 그날처럼, 춘아 고모가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아주던 그날들처럼, 나는 아코디언을 안은 채 전율을 느꼈다.
--- p.26
하얀 습자지에 싸인 그것을 처음 펼쳐보았을 때 우윳빛이 배어나오는 색감과 부드러운 기둥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물한테는 특별한 사람에게처럼 정이 가는 일이 있었는데, 순남씨에게 은촛대가 그랬다.
--- p.33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서 글이라는 것을 써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지금의 이 생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신기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제는 하루라도 이 오래된 타자기를 두드리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공주님께서는 제게 아무 부담도 주고 싶지 않다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때 말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사실, 저는 공주님께서 하시려는 작업이 무엇인지 종종 궁금해집니다.
--- p.63~64
그는 나에 대해, 그러니까 나의 삶, 나의 과거, 심지어 이번 여행의 목적에 대해 묻지 않았고, 그런 그에게 자유로움과 호감을 느꼈다. 보이는 대로 그는 생각할 것이고, 나 또한 그에 대해 그러할 것이었다.
--- p.92
하늘로 올랐으려나. 이제 자네 차례네. 순정?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네. 없으면, 사내도 아니지만. 박이 사공의 노를 저지했다. 안나가 흘러간 그 물길을 따라 조금 더 흘러가보고 싶었다. 박은 눈을 감았다.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사공이 노 젓는 소리, 흐르는 물소리였다.
--- p.121
그것이 정말 구두였는지,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었는지, 또한 그것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너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물감의 흔적을 또렷이 새겨놓았고, 이물감이란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생명력이었다.
--- p.139
나는 그 우물, 천 년 동안 아이를 고이 품어온 그 우물이 보고 싶었다. 그 시커먼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우물이라 했다. 어린아이를 집어삼킨 무시무시한 우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우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인골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165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햇빛 쏟아지는 난간에 세워놓고 소리쳤다. 웃어요, 언니, 웃어! 웃는다고 웃었는데 결과는 찡그린 미소였다. 햇빛 때문이었다. 나는 그늘에서 카메라에 찍힌 상태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찍으려다 그만두었다. U는 마치 너무 웃지 않아서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웃어! 라는 내 외침에 당혹스럽게 웃음을 지었던 것이었다.
---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