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이자 프로듀서, 음악감독. 2003년 캐스커Casker란 이름으로 데뷔 앨범 [철갑혹성]을 발표한 이래 6장의 정규 앨범과 다수의 싱글을 발표하며 캐스커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왔다. 자칫 차갑게 들릴 수 있는 전자음에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 같은 섬세한 감성을 불어넣으며 ‘심장을 가진 기계 음악’, ‘노래하는 전자 시인’ 등으로 불린다. 캐스커로서의 활동 외에 영화 [더 테러 라이브]와 [제보자] 등의 음악을 맡기도 했으며 밴드로서의 활동과 음악감독으로서의 활동을 병행 중이다.
사실 나는 그 폭포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 역시 할리우드의 CG 기술은 대단하군’이라는 감상과 함께. ‘그래 태초의 지구는 저런 모습이었겠지. 기가 막히게 묘사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이 정말 존재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 지구에. 내가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세상의 어딘가에는 정말 저런 곳이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저렇게 홀로 저 거대한 물줄기가 매일매일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 p.14
완만한 고갯길을 오르다가 내리막이 나타나자 곧바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아득히 먼 곳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의 눈 덮인 산, 그리고 끝이 가늠되지 않는 거대한 호수, 도시의 바로 근처라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광활한 평원. (……) 시내 밖으로 나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자동차 안에서만 이런 경치를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차를 길가에 대고 내렸다. 검은색이 감도는 낯선 색의 땅을, 깎아놓은 듯 정갈한 낯선 형태의 돌을, 낯선 모양의 이끼를, 이 낯선 세상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 p.37-38
싱벨리어의 호수로 가는 길이 보이기에 또 차를 멈추고 호숫가 쪽으로 걸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호수에 손을 담가보았다. 차갑고 맑은 물, 내 손끝이 닿은 곳부터 호수의 반대편 끝까지 내 떨림이 전해질 것만 같다. 왠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 말곤 아무도 없는 이 조용하고 거대한 호수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서 웃었다. 즐겁지도 웃기지도 않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했을까? 아니, 그들도 나와 함께 웃었을 것이다. --- p.39-40
이곳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것을 원해서 왔지만, 이곳에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아니 그전엔 돌아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간 욕심내어 가지려고, 지키려고 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 어쩌면 모두 부질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본질적인 아름다움. 내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곳곳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것들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온 것은 아니었을까. 차가운 바람이 내 머리를, 가슴속을 비워내고 있었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은 호수 가득한 얼음들이 되레 나를 녹여내고 있었다. 보트 위에선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늘과 날씨와 위도와 영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슬픈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모든 언어를 잃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 p.67-68
서울에서 ‘외롭다. 쓸쓸하구나.’ 입버릇처럼 말하던 지난 시절들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상에서의 고독도, 군중 속에서의 고독도 모두 저마다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피부에 맞닿는 절대적인 고독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드넓고 하얗고 서늘한 눈의 풍경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 혼자 고립된 나는 우주 한가운데 홀로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있어선 안 되는 신비의 성역에 발을 디딘 죄로 벌이라도 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고독감이 때론 공포가 되기도 하는구나. 수많은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p.87
주변을 한참 배회하며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러고는 이내 멍하니 넋을 놓고 한참 동안 폭포에 시선을 빼앗겼다. 다시 눈발이 흩날린다. 이것은 아름다운 풍경인가? 아니 아름답다고만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이를 보고 있는 나는 행복한가. 아니, 행복하다고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