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의 10대 후손으로 노아(B.C. 2704~1754)라는 사람이 태어났다. 노아는 아벨이 죽은 후 태어난, 아담과 이브의 아들인 셋의 후손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불려 갔다는 에녹의 증손자이다. 노아는 양심에 따라 바르게 행동하고 이웃들과 화목하게 사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여호와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인류가 다시 삶을 시작한다면, 노아는 아주 훌륭한 조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노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 p.30
우리는 앞으로 블레셋이란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히브리 사람이나 서부 아시아의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셈 족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본래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크레타 섬의 원주민이었는데, 약 1000년 동안 세계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수도 크노소스가 적에게 파괴되자 섬을 탈출한다. 이 참사의 생존자들은 바다로 도주하여 나일 강 삼각지에 정착을 시도했지만, 이집트인들로부터 쫓겨난다. 그들은 동쪽으로 항해하여 지중해와 서부 구릉지 사이에 위치한 길고 좁은 지역을 차지한다. 이집트인은 이 부족을 블레셋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우리들은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 --- p.122~123
유대인들은 약 70년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집트, 바빌론 그리고 페르시아의 주요 상업 도시에 계속 살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성한 수도 이스라엘 의 성벽 안에서 많은 종교적 축제를 올렸다. 그들은 아직도 빛바랜 도시를 정신적 고향으로 간주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 여호와에게 제물을 바치고 마지막 경배 시를 읊조리고 나면, 모든 방문객들은 수사 성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1년 열두 달을 수도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면,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더없이 자랑스러운 도시였다. 예루살렘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상반된 마음은, 앞으로 4세기 동안의 크나큰 고통과 시련을 자초한다. --- p.239
예수는 소수 무력 집단의 이해타산에 따라 공화정 로마가 로마제국으로 넘어가는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도 알지 못했다. 그리스 말을 몰랐던 예수에게는 그리스 말로 적힌 어떤 자료도 종이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 예수를 무자비한 로마인, 세련된 그리스인, 교리적인 유대인과 차별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그의 가슴은 동포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나사렛 친구들과 갈릴리 이웃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로 뚫린 도로 저편의 광대한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었다. --- p.307~308
조용한 갈릴리 계곡에서 성장하여 상거래와 물물교환에 익숙하지 못한 예수에게, 울부짖는 황소와 소리치는 환전상의 존재는 신에 대한 불경과 모독으로 비추어졌다. 여호와의 집이 시끄러운 장터로 변한 것이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예수가 채찍을 집어 모든 무리를 성전 밖으로 몰아내고, 불쌍한 짐승들은 주인에게 보내니 여호와의 집이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 왕궁의 첩보 담당자는 질서를 파괴하는 예수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가축 판매상과 환전상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선지자와 선량한 대중을 정면으로 대치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p.317~318
(……) 예수의 제자들은 매우 충실했다. 특히 열두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와 함께했고, 각자의 부족함을 우정으로 채워 주고 서로 친형제처럼 사랑했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은 달랐다. 가룟 유다라는, 그리욧에 사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 유다의 제의는 공회의 속셈과 딱 맞아떨어졌다.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얼마를 지불할 것인가? (……) 일정 금액이 제시되었다. 가룟 유다는 만족했다. 거래가 성립됐다. 예수는 적들에게 팔렸다. 값은, 은화 서른 개였다. --- p.337~339
마침내 로마 황제가 자신의 터전에서 사는 것조차 안전하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은 테베레 강을 떠나 살 곳을 찾아 어디로든 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주교들이 당연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정치를 완전히 장악했다. 주교들만이 탄탄한 조직력을 유지했으므로, 수도에서 쫓겨난 황제들이 명목상의 권위라도 지키려면 그들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 A.D. 313년, 관용을 담은 공식 칙령은 그리스도교인 박해를 종식시켰다. 1세기 후, 로마는 전 세계의 정신적 수도로 부상하게 된다.
--- p.380~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