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그날은 이상했어.”
“그날? 무슨 날?”
“우리 이백 일 날 말이야. 우리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었어.”
“사랑 확인? 그런 걸 꼭 해야 하는 거냐?”
“몰라. 어쨌든 중요한 날에는 뭔가 이벤트가 필요하잖아. 우리의 이벤트는 그거였다구.”
“얼씨구나!”
미루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낯이었다.
“친구야. 너 아까 나한테 그랬잖아? 사랑한다면 하는 거라고.”
“응? 아! 그랬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오빠도 나도 정말정말 사랑하거든.”
“아무렴. 죽도록 사랑하겠지.”
“나보다 오빠가 더 나를 사랑해.”
“그걸 어떻게 알아? 저울에 달아봤냐? 자로 재봤냐?”
“오빠는 나를 볼 때마다 그걸 하고 싶대.”
“그거? 아. 그거”
“미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미치게 하고 싶대. 나도 가끔은 그래. 오빠만큼 미치게는 아니지만. 오빠와 그걸 하면 정말로 진짜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걸 느껴.”
달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글쎄, 이 언니 생각에는 말이야. 사랑과 섹스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달림은 침을 꼴깍 넘기고 중얼거렸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하고 싶은 건지, 그게 하고 싶어서 사랑을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건지, 사랑하는데 안 할 수도 있는 건지……, 아이고 모르겠다. 내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아이고! 어렵다. 어려워.”
달림은 뱅뱅 도는 제 머리통을 퉁퉁 두드렸다.
--- pp.75~77
“이 모자는 시간을 담아주는 모자야. 모자 안에 보풀들에게 필요한 시간을 담아줘야 해. 한 코 한 코 정성을 다해서.”
슈가맨의 낮은 목소리가 은은하게 동굴 안을 흘렀다.
“네. 한 코 한 코 정성을 다해서요.”
슈가맨이 뜬금없이, “여기, 참 좋지” 물었다.
“네. 정말 멋진 곳이에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왔나?”
“보푸라기가 자기 집이라고…….”
달림은 고개를 들어 동굴 안을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그러니까 고아원이죠? 보푸라기가 엄마를 기다리던데, 엄마가 이곳에 맡기고 갔나요?”
슈가맨이 대답했다.
“이 동굴은 우리 보풀들의 아지트야.”
“보풀들은 고아들을 말하는 건가요?”
슈가맨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고아가 아니야.”
“그럼요?”
“에밀레 별에서 온 아이들이야.”
“별……이라고요?”
--- p.173
“꼬마야. 나 보고 싶었어?”
노랑모자가 “보고 싶었어.” 바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예쁜 꼬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보푸라기라고 했던가?”
노랑모자는 씩씩하게 외쳤다.
“요요!”
언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내 진짜 이름은 요요잖아.”
언니는 달림을 건너다보았다.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달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니의 눈빛이 깊은 우물처럼 출렁거렸다.
“꼬마, 집은 어디니?”
“저기.”
“오늘도 고양이랑 놀려고 왔어”
“응.”
“엄마한테 허락받고?”
“엄마? 엄마 찾아야 해.”
언니는 당황한 얼굴로 또 달림을 건너다보았다. 흡! 달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배꼽 안쪽에 힘을 빡, 모았다. 여기부터 시작이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만 하는 시간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엄마 찾아야 해?”
언니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달림은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이 근처에 할아버지하고 사는데, 내가 좋다고 자주 놀러 오는 거야.”
노랑모자가 냉큼 끼어들었다.
“고양이가 더 좋아.”
녀석, 꼭 짚어 말하기는…… 달림은 몹시 서운했다.
“이 애 할아버지가 안 찾아?”
“응. 데리고 놀아주면 좋아하셔. 오늘도 여기서 자고 와도 좋다고 허락받았고.”
달림은 슬픈 눈빛을 만들어 중얼거렸다.
“얜 거의 혼자 지내. 할아버지가 엄청 바쁘고 골골하시더라구.”
노랑모자가 또랑또랑 참견했다.
“슈가맨, 엄청 바쁘고 골골하셔.”
언니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노랑모자를 꼭 안았다. 노랑모자는 언니의 품에 안긴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니는 계속 노랑모자의 등을 토닥거렸다. 노랑모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언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소리쳤다.
“엄마!”
--- pp.267~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