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The New Yorker』 International Fiction 특집호 아시아 유망작가 선정 기념 <임신 캘린더> 전문 수록(2005. 12. 26~2006. 1. 2)!!
오가와 요코는 2004년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가슴 한쪽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6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확실한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지난 1월 21일 영화로도 개봉되어 개봉 첫 주 일본 박스오피스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CJ 엔터테인먼트 한국 수입 배급 결정!)
이처럼 2005년 최고의 한 해를 보내며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자리 잡은 오가와 요코의 출세작이 바로 『임신 캘린더』이다. 이 작품은 1991년 오가와 요코에게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안겨주었고,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간되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지로부터 “오가와 요코는 일본 문학계에서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라는 호평을 받게 했다.
이번 작품에서 오가와 요코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보여주었던 작품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큰 주제가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 오가와 요코가 선택한 것은 공포라는 코드다.
그 공포는 마치 어느 날 꿈에서 본 듯한, 하지만 악몽처럼 온몸을 식은땀에 젖게 하거나 가위에 눌리게 만드는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공포가 아니라 서서히 우리 몸에 파고들면서 어느 순간 오싹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감각적인 공포다.
어느 날 문득 꿈에서 본 듯한, 악몽은 아니지만 왠지 오싹한…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오가와 요코의 세 가지 색 공포
이 책의 표제작이자 제10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임신 캘린더>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임신에 얽힌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단지 일기의 주인은 임신 당사자가 아니라 언니의 임신을 지켜보며 미묘하게 심리 변화를 일으키는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일찌감치 부모를 여읜 탓에 언니 부부와 함께 산다. 나름대로 화목하게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 날 언니의 임신 소식이 전해지고 흥분된 모습을 보이며 감격에 겨워하는 언니와 형부 앞에서 여동생은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언니의 임신에 낯설어한다.
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서였을까? 불안과 혼돈을 겪던 여동생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슈퍼에서 우연히 얻은 미국산 그레이프프루트로 잼을 만들며 언젠가 환경 관련 강의에 참석했을 때 본 문구들을 떠올린다.
‘위험한 수입 식품!’ ‘출하 전 세 종류의 독약 세례를 받는 그레이프프루트’ ‘항곰팡이제 PWH에 강력한 발암성 물질 함유. 인간의 염색체를 파괴한다!’
그리고 마침 입덧이 심해 음식은 물론 사소한 냄새에도 거부반응을 보이던 언니가 돌아와 이 잼을 보고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태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동생은 가만히 생각한다. ‘PWH가 태아 염색체도 파괴하려나.’
이 책은 <임신 캘린더> 외에 사촌동생에게 자신이 학창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를 소개해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기숙사>와 어렸을 적의 충격적인 경험으로 기묘한 취미를 갖게 된 한 부자의 이야기인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이야기 모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때문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야기를 읽다 보면 왠지 낯선 기분에 휩싸인다. 그것은 아마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소재이지만 그것들을 중심에 놓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아니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실로 끌어내기에는 꺼림칙했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또 다른 끝
세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임신 캘린더>에서는 출산을, <기숙사>에서는 스웨덴에서 해외 근무를 하고 있는 남편의 부름을, 그리고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에서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을.
하지만 그녀들에게 가장 절실해야 할 이 기다림은 현실의 저 뒤로 밀려나 있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임신으로 피폐해진 심신과 입덧 후의 폭식, 십 몇 년 만에 만나는 사촌 동생과 그 동생이 살게 된 묘한 기숙사와 기숙사의 선생님, 무슨 종교를 전도하러 다니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집착이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설레는 가슴으로 아기 옷을 마련하고 아기 방을 꾸미는 엄마의 모습은 여기에 없다. 남편이 보낸 편지를 애틋한 심정으로 읽어 내리며 남편이 꼼꼼하게 정리해 준 이사하기 전에 할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가는 아내의 모습도 없다. 그리고 결혼 날짜를 앞두고 알콩달콩한 새 생활을 꿈꾸며 신접살림을 하나둘 마련하는 새 신부의 모습도 없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마치 남의 일이듯 멀게 느끼고 때로는 외면하기까지 한다.
때가 되면 반드시 찾아올 기다림의 끝, 그 끝에 있는 출산과 멀리 떠난 남편과의 재회, 결혼 등은 어쩌면 여자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수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는 낯설고 두려운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기쁨과 설렘과 기대감의 저변에는 이 미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늘 도사리고 있다. 불 꺼진 기숙사에서,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미끄덩한 액체를 피라고 단정하는 섬뜩함. 그것은 기다림의 끝이 실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한없이 비대해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다.
나는 흔히 부푼 가슴과 벅찬 설렘으로 얘기되는 출산과 결혼을 앞둔 여자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막연하고 모호하고 미묘한 흔들림을 이토록 정치하게 그려낸 소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맞닥뜨려야 할 현실, 코앞에 있는 현실 저 너머로 돌려진 여자들의 허망한 눈길과 그 서늘한 외로움을 이렇듯 환상적인 필치로 그려낸 소설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작품집의 진정한 매력은 무엇보다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혼란스러움, 그 혼란스러움으로 우리 가슴에서 되살아나는 다양한 감정의 미궁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옮긴이 김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