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보다 더 재밌는 음악에세이
--- 허순용(blog.yes24.com/sellavy)
나는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노래를 잘 하지는 못해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동그랗게 모여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노래는 진실로 마음을 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예술'이었다. 음악 시간에는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 즐거움이 컸다. 세상에는 어쩌면 음악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감정을 그토록 아름답게, 혹은 슬프게, 일깨워 주는지 놀라왔다.
서양 고전음악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본 것은 대학에 와서였다. '도대체 왜?' '뭣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어렵고 지루해 보이는 클래식을 듣고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이 떠올랐고, 분명 내가 잘 모르는 매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한번 들어보자고 마음 먹고 들어 본 것이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는 바로 맛이 가 버렸다. 그 후 내가 걸어간 길은 이른 바 '폐인의 길' 로서 많은 선배들이 앞서 간 바로 그 길이었다. 그 코스의 필수과목은 '음반 사 모으기', '음악/음반 관련 책 사 모으기', '음악 잡지 구독하기', '음악회 가기' 이며, 살림은 거덜이 나는데도 어떤 환희에 젖어 헤매는 묘한 증상을 동반했다.
내게 처음으로 날카로운 키스를 날린 것이 바이올린 협주곡이어서, 일단 나의 레퍼토리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피아노 협주곡, 첼로협주곡 등 악기를 바꾸어가며 각종 협주곡을 섭렵하고는 그 다음엔 소나타로 넘어갔다.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곡들을 죽을 때까지 듣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특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라든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특히 클라라 하스킬과 아르투르 그뤼미오가 연주하는)를 듣지 못하고 죽는다면 말이다. 바흐의 음악은 지극한 평화요 말러의 음악은 거대한 심연이었다. 그리고 음악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음악은 모두 나름대로 다 가치가 있고 마음을 울리는 바가 있었다.
이렇게 여러 곡을 찾아 듣는 과정에서 많은 책의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말랑말랑한 음악에세이에서부터 각종 음반 소개 책자, 그리고 <서양음악사> 나 <말러:음악적 인상학> 따위의 제법 딱딱한 책까지...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장르는 음악에세이였다. 음악과 어떻게 만났으며 음악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쓴 책, 한 곡 한 곡 가슴으로 듣고 느낀 것을 차분히 써 내려간 책들. 그 책들이야말로 음악을 사랑하는 순수한 아마추어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했으며, 또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를 전문가보다 더 진실하고 절실하게 짚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두 권만은 꼭 언급하고 싶다. 소설가 송영(그는 골수 음악팬이다)이 쓴 <무언의 로망스>. 개인적인 이야기 투성이였지만 그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즐거움과 함께, 음악이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이 녹아들 수 있나 확인케 해 준 책이다. 또 하나는 조희창의 <전설 속의 거장>. 세계 유수의 지휘자와 연주자들과 음반을 소개한 그 책은 패기와 힘이 넘치는 문체 때문에 음악을 듣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나는 최근 2-3년 새 내 마음을 사로잡는 또 다른 음악에세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실제 음악보다 더 재밌는 음악에세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에게 음악을 소개해 주거나 추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이처럼 열정적으로, 그러나 오버하지 않으면서, 뛰어난 문장력과 진정한 애정을 담아, 간결하고 재미있게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음악적 편력은 청소년기로부터 수십 년에 걸쳐 있고, 각종 동호회나 음악모임 등 야전에서 뛴 경험이 풍부하며, 문장력 또한 (조금 과장하자면) 글 잘 못 쓰는 소설가보다 훨 낫다. 무엇보다 그는 감수성이 풍부하여 누구보다 음악을 절실한 마음으로 듣는다. 그것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이 나오자마자 이 바닥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일반인들로부터도 커다란 호응을 얻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수십 년 쌓인 내공을 바탕으로 그는 최근 2-3년 동안 실로 놀라운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출간하고 약 1년 뒤에 <유럽음악축제순례기>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책도 큰 매력을 갖고 있었지만 작업 속도라는 면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사실 이 책은 여행기 형식을 빈 매력적인 음악축제 편력기이며 내가 아주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2개월 뒤 곧바로 엄청난 두께를 가진, 강력한 열정과 의지의 산물인 <불멸의 오페라>를 내놓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 어안이 벙벙했다. 953페이지에 정가 45,000원을 달고 나온 그 책은, 정말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은 멋진 오페라 소개서였으며, 오페라를 보고 싶어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매우 요긴한 책이었다. 이 책은 클래식 중에서도 특히 오페라 마니아인 저자가 20여년 동안 준비해 왔던 책이다.
그리고 채 1년도 안 돼 다시 내놓은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2>. 나는 솔직이 이 책이 1권보다 더 좋았음을 고백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연주자나 음악적으로 가치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연주자를 부각시켜 소개한 점이 좋았고, 한편의 글에서 자연스럽게 작곡가-연주자-곡을 연결시켜 설명해주는 방식도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이 책에 시종일관 흐르고 있는 저자의 섬세한 감수성과 휴머니티다.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우울증에 빠진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겨울에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좀 풀렸다고 하자, 저자가 자신의 CD플레이어에서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크리스마스캐롤 CD를 꺼내 주는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또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와 그 곡을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 부자, 그리고 일본인 스즈키와 그의 장애인 아내 히토미의 이야기를 엮어, '둘이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풀어 준 글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덧없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이 각인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다 해도 허황된 것은 아니리라. "당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통해 음악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통해 음악마저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