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일대일 사역에 매달리나?” 하고 사람들이 궁금해 할 만큼 온누리교회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나는 일대일을 떠날 수 없었다. 일대일 양육을 받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사람들이 점차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교회를 단단히 섬기는 주역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대일이야말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은 내가 일대일에 목숨을 걸도록 이끄신 나의 참 스승이시다. 끊임없는 지지와 격려로, 때론 질책으로 함께하시면서 ‘일대일로 세계로’의 꿈을 심어 주셨다.
하 목사님은 2000년에 대수술을 한 후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를 발견했다고 하셨다. ‘일대일은 보물이다’와 ‘사회적 책임의 통감’이었다. 이후 하 목사님은 1인 1사역을 넘어, 1인 1사역 1봉사를 선포하시고, 봉사의 가장 깊은 기저에 잘 훈련된 양육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 을 강조하셨다. 그 후 잘 훈련된 양육자들을 타 교회에 파송하는 ‘벤처 (Spiritual Adventurer, 영적 모험가의 줄임말) 팀’을 결성하고, 배우고 익힌 예수님의 영성을 보여주고, 나누고, 섬기는(3S: Showing, Sharing, Serving) 대 교회적, 사회적 봉사를 감당하게 했다.
우리는 이 일을 ‘제2의 종교개혁’이라 불렀고, 성도들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건강하게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책임지는 일꾼으로 자라났다.
--- p.16~17
“일대일은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일대일 사역을 설명할 때 내가 가장 많이 외친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제자양육 방법은 성경공부다. 성경공부는 많은 사람을 놓고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교육은 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양육이라고 할 수 없다. 일대일은 양육자가 동반자라는 한 영혼을 품고 정말 맞춤복 같은 눈높이 양육을 하기 때문에 눈물과 기도가 있고 치유와 회복이 있으며 성령의 역사와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양육된 사람은 삶의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 건강한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일대일을 ‘치유와 회복의 맞춤복’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의 양육자는 한 사람의 동반자를 돌보면서 작은 목자가 되고, 동반자 역시 양육을 받은 후에는 또 다른 동반자를 돌보는 양육자가 된다. 이렇게 훈련받은 성도들은 각자 달란트를 따라 은사를 발견하고 사역하고 봉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성숙한 영적 리더들은 솔선하여 가장 험하고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게 되어 귀감이 되는 건강한 성도로 거듭나게 된다.
일대일은 무엇보다 매일 큐티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나누며 순모임에서도 큐티를 중심으로 나누기 때문에 말씀이 삶의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만든다. 일대일은 그야말로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하라’를 실천에 옮기는 사역이다.
--- p.28~29
초기에 일대일 양육은 하 목사님이 직접 가르치셨다. 특이한 점은 남자를 영적 리더로 세우자는 원칙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대일 양육도 우선 남자 중심으로 진행됐고, 가정 단위로 모이는 순모임의 리더도 남자를 세웠다. 그렇다 보니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언제나 남자들이 앞장서서 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온누리교회 남성들은 백수인가 보다고 할 정도였다.
온누리교회에서는 장로로 피택되면 먼저 청바지에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청소부터 섬기고, 식당 설거지와 주차 봉사 등 구석구석을 섬기게 된다. 이렇듯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이던 남성들이 교회를 주도하게 되자 모든 성도가 교회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교회 분위기로 바뀌었다.
바울이 3년간 밤낮으로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고 가르쳤다고 했는데, 성도들은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동반자를 가르치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교회가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 p.35~36
일대일 사역이 진행되면서 변화된 성도들의 저력은 놀라웠으나 일대일의 참여율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동분서주하며 기도로 연결하고 열심을 다했으나 늘 2퍼센트가 부족했다.
일대일뿐만 아니라 온 교회가 엔진만 붕붕거릴 뿐 박차고 올라가지 못했다. 온누리호라는 큰 비행기는 기름도 충분하고 승객도 꽉 차고 잘 훈련된 승무원도 있고 능력 있는 기장도 있는데, 결정적으로 비상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일대일을 온누리교회 양육 체계로 정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다. 1992년 하 목사님의 선포가 있은 후 일대일은 온누리교회 공식 양육 체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시작한 지 만 6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임직 후보자는 한 사람이라도 양육하지 않으면 집사가 될 수 없고 3명 이상 양육하지 않으면 장로 후보자가 되지 못한다는 조건이 추가됐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지키는 자라야 임직자로서 자격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온누리교회 성도는 이제 공동체 리더십부터 전도훈련, 비전과 리더십, 선교와 아웃리치는 물론이고 큐티와 일대일을 필수로 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것이 야구 경기처럼 일루, 이루, 삼루, 홈의 순서로 가는 야구 모델(Baseball Model)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지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웹 모델(Web Model) 체계라는 점이다. 이로써 모든 성도가 머리, 가슴, 손발 모두를 갖춘 균형잡힌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고, 일대일 양육 체계는 그들이 세상으로 가지고 나갈 무기요 도구가 된다. 이것은 당시 양육 총괄 담당이던 이재훈 담임목사님의 교회 시스템 변화에 대한 연구결과였다. 그렇게 일대일이 교회 제도권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되기까지 참 힘든 시간을 겪어 냈다. 중간에 목숨도 한 번 걸고 목도 한 번 걸었다. 이후 일대일은 ‘온누리교회 목회 엔진’, ‘온누리교회 핵심 DNA’로 불릴 만큼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일대일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물론 성도에게 사역을 돌려주고(제2의 종교개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이양시키는 분명한 삶의 변화와 나눔 문화를 온누리교회에 심어 주었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든든한 지지대가 되었다.
--- p.52~54
정호옥 목사님은 교회 초창기부터 일대일 사역을 섬겼는데 일대일에 생명을 걸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셨다. 당시 교회를 다니던 분들 중에 정 목사님으로부터 “일대일 훈련받으세요”, “양육하세요”라는 권면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정 목사님 못지않게 일대 일위원회의 열심도 대단했다. 특히 양육위원들 중에 신실한 분들이 많았는데 주일마다 모여 1시간 이상씩 기도했다.
이때 함께한 분들 중에 나를 비롯해 목사가 된 분들도 있고, 복음을 전하러 떠난 선교사도 있고, 교회의 기둥 같은 장로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교회가 부흥하고 일대일 사역이 커지면서 일대일 위원들은 각 공동체의 일대일을 섬기는 사역자로 파송되었다. 일대일이 공동체로 흩어지면서 공동체 담당 목사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정 목사님이 전체를 지혜롭게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잘해 내셨다. 중간에 위기가 닥친 적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지킨 사람도 정 목사님이다.
1990년 말 하용조 목사님이 해외로 안식년을 떠나셨는데 떠나시면서 교회를 비우는 것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일대일 양육자 대회를 통해 성숙한 양육자들을 보시고 걱정을 놓고 떠날 수 있다면서 안식년을 떠나셨다. 정말 놀라운 일은 하 목사님이 떠나 계신 동 안에도 교회는 부흥했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이다.
1992년에 일어난 일이 생각난다. 그해는 그야말로 일대일의 진가가 드러난 해였다. 당시 온누리 성도들을 대상으로 영성에 관한 조사를 했더니 첫째, 하 목사님의 설교가, 둘째, 일대일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하 목사님은 일대일을 온누리교회의 최우선 사역으로 여기셨고 “누구든지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하라”는 말씀으로 일대일을 독려하셨다.
나는 일대일 양육을 하면서 깨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일대일은 성경공부가 아니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성령께서 양육자와 동반자 두 사람을 나눔 가운데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간혹 다른 교회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일반 성도처럼 가장해서 일대일 양육을 받곤 했다. 그 런데 그들은 양육자의 한결같은 성실과 겸손함에 은혜를 크게 받았다는 고백을 했다.
양육 과정에서 양육자와 동반자의 관계가 돈독해져서 서로 힘들고 어려울 때 앞장서서 돕고 기도해 주는 일은 부지기수다.
재미있는 일도 있는데 비슷한 성향의 양육자와 동반자가 만나는 경우다. 둘 다 까다로운 성격인 경우, 초반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둘 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가 되곤 했다.
끝으로 나와 아내를 하나님께서 일대일 사역에 사용하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994년, 대학에서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시애틀로 가게 되었다. 주일에 시애틀 온누리교회에 갔더니 담임목사님이 우리 부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대일 양육할 팀을 둘이나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애틀 온누리교회는 개척한 지 한 달여 되었는데도 교인 수가 벌 써 100명이 넘었다. 교회의 기초를 일대일로 세우기 원하는 목사님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가자마자 양육을 시작해서 1년 동안 40명을 양육했다. 하루는 북쪽으로 하루는 남쪽으로 한 시간씩 가서 양육을 하고 돌아오는 식이었는데 귀국을 위해 짐 싸는 날까지 양육하고 비행기를 탔다. 교회를 일대일로 세우는 데 우리 부부를 사용하신 것에 지금도 너무 감사하다.
아내는 일대일을 하면서 혈기가 많고 성질도 급한 내가 오래 참고 온 유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말씀으로 나누는 것이 축복인 이유가 아무리 교만한 사람도 말씀 앞에서 결국 무릎 꿇게 되어 말씀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변하다가 결국 목사가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목회할 때 나는 하 목사님께 배운 그대로 목회를 했다. 그중 일대일 양육이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가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일대일이 더 깊이 뿌리내려 온누리교회를 건강하게 세 워 가고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란다.
--- p.5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