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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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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5년 09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520쪽 | 758g | 150*220*26mm
ISBN13 9791186293294
ISBN10 118629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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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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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이클 해그 Michael Haag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사진작가. 영국, 미국, 이집트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는 한편, 영국 BBC에도 출연하고 있다. 고전 시대와 중세, 이집트를 다룬 책들을 다수 출간했고, 주요 저서로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서The Quest For Mary Magdalene》(2015), 《성전기사단의 비극: 십자군 국가들의 흥망성쇠The Tragedy of the Templars: The Rise and Fall of the Crusader States》(2012), 《사라진 오아시스The Lost Oases》(2006), 《투탕카멘의 모든 것The Rough Guide to Tutankhamun: The King, The Treasure, The Dynasty》(2005), 《알렉산드리아: 기억의 도시Alexandria: City of Memory》(200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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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성지 순례 전통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일찍부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순례를 떠났다. 기원후 2세기 초에 이미 거룩한 땅의 ‘예수가 탄생한 동굴’을 순례자들이 방문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장소들을 보고 싶어 했다. 유대교에도 영웅이나 거룩한 인물을 기념하는 전통은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특이하게도 무덤과 유해에 유독 관심이 높았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부정한 대상이었으나 기독교인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죽은 자들은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잠을 자고 있다가 결국 부활할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보물처럼 여기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위해 죽었지만 이미 천국에 올라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p.57
당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무슬림들이 진주했을 때에도 기독교 성지들을 순례하는 데는 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현지의 기독교 수도원들과 공동체들도 안전에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무슬림들도 순례라는 관행을 잘 알고 있었다. 성지(메카) 순례는 이슬람 신앙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일 정도다. 더구나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비롯한 기독교 성지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게 상당한 수입원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거룩한 땅은 예수의 삶과 죽음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무슬림들이 성지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도 기독교 순례자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 p.92

이슬람의 정복 전쟁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전쟁 가운데 하나인 이슬람의 정복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그 시작은 622년 아라비아 반도였다. 무함마드는 유일신을 믿으라고 설파하면서 아랍 부족들을 강력한 군대로 통합해갔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은 이런 무함마드의 활동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p.69

우르바누스의 호소
“셀주크튀르크가 기독교인들의 본향으로 쳐들어와 기독교인 주민을 학대하고 성지와 교회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비잔티움 황제가 지원을 호소해왔습니다. 마땅히 응답하는 것이 서방의 의무입니다. --- p.…) 서방은 이제 원정을 통해 동방을 구원해야 합니다. 귀족들은 서로 간의 싸움을 멈추고 정의의 전쟁에 나서야 합니다. 거기서 싸우다 죽은 이들에게는 죄 사함이 주어질 것입니다. 무장한 순례자들은 추수를 끝내고 여름에 출정하도록 하십시오. 성모마리아 몽소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 말입니다. 군사들의 일차 집결지는 콘스탄티노플입니다.” --- p.102

위험한 순례길
기진맥진해서 뒤처진 순례자들이나 무리의 규모가 작아서 방어력이 약한 경우에는 주변 광야에 사는 유목 베두인족 집단의 먹이가 되었다. 산적들은 주저 없이 사람을 죽이고 옷 속에 꿰매 넣은 전대에서 돈을 털어갔다. 시체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로 곳곳에 그대로 버려진 채 썩어갔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동료는 남아 시신을 수습해서 기독교식으로 매장을 해주는 일 역시 너무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산적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북쪽에서는 튀르크족이, 남쪽에서는 이집트인이 준동했다. --- p.…) 특히 1019년 부활절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7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순례단이 비무장 상태로 예루살렘을 출발해 요르단 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뒤섞인 무리였다. 이들은 한 독일 기록자의 표현을 빌리면 ‘기쁨에 겨워 벅찬 마음’으로 걷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스칼론에서 출발한 이집트인 무리가 이들을 습격했다. 순례자들 중 300명이 살해되었고 60명이 붙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 pp.130-131

성전기사단의 태동
성전기사단의 결성은 이러한 치안 부재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도로변에서는 비무장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살인과 강간, 노예로 팔아먹기, 약탈 같은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샹파뉴 출신으로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위그 드 파앵과 피카르디 출신인 생토메르의 고드프루아를 비롯한 프랑크인 기사 아홉 명이 예루살렘 총대주교 피퀴니의 가르몽과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를 찾아와서, 평신도 공동체를 조직해 수도원처럼 명상하는 삶을 살면서 영혼의 구원을 얻고자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순례자들이 피해를 보는 일로 골치를 앓던 보두앵 2세는 위그 드 파앵 일행에게 여행 중인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과업을 맡아 영혼의 구원을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간곡히 설득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기사 아홉 명은 수도사들이 하는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과 함께 ‘도적과 강간범으로부터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맹세를 했다. 불과 몇 달 전 부활절에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강으로 가다가 학살당한 순례자들을 기억하고 있던 기사들은 보두앵 2세의 설득에 공감했을 것이다. 1119년 성탄절에 위그와 그의 동료들은 성묘교회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 앞에 나와 서약을 하고 스스로를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가난한 기사들’이라고 칭했다. --- pp.131-132

가난한 기사단원
‘가난한 기사들’은 개인적으로는 그야말로 가난해서 남이 희사한 옷만 입을 정도였다. 이는 별도의 제복 같은 것이 없었다는 의미다. 성전기사단의 제복으로 유명한 빨간 십자가를 선명하게 수놓은 하얀 튜닉은 후대에 등장했다.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은 기사 둘이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있는 형상인데, 각자 말을 구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만 형제애는 지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 pp.133-134

성전기사단의 평상시 일과
오전 4시 기상 및 아침 기도. 말 돌보기. 이후 다시 취침.
오전 6시~정오 미사 참석. 기도(오전 6시경), 기도(9시경), 기도(정오 무렵). 기도 사이사이에 말을 돌보고 훈련시킴.
정오 고기 위주의 점심 식사. 철저히 묵언 상태로 식사하는 동안 사제는 성경 봉독.
오후 3시 오후 미사 참석.
오후 6시 저녁 기도 후 저녁 식사.
오후 9시 취침 전 기도. 그 뒤에 물을 섞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심. 다음 날 일과에 대해 설명을 듣고 말을 보살핌.
자정 취침.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완전 정숙 유지 --- pp.140-141

성전기사단의 특권
1139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모든 완전한 선물]이라는 제목의 칙서를 반포했다. 이를 통해 성전기사단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교황을 제외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영구적인 조직으로 우뚝 서게 되었으며, 교회의 수호자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적을 응징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성전기사단의 단장도 외부의 간섭 없이 기사들이 직접 선출하게 되었다. 기사들 역시 사제 서품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직자와 같은 존재로 인정되어 단장의 지시만을 따랐다. 기사단은 우트르메르나 서방의 특정 교구 주교의 지시와 감독을 받지 않는 독립 조직을 뜻했다. 따라서 자체 예배당과 묘지를 보유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기사들은 십일조를 비롯해 교회에 내는 각종 헌금이 면제된 반면에 자산에 대한 십일조는 자유롭게 거둘 수 있었다. 불신자들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은 당연히 기사단의 소유였다. 성전기사단에 낸 헌금은 교황의 보호를 받았다. --- pp.142-143

기사단 세력 확장의 요인
전시에는 농업이 맨 먼저 희생을 당했다. 서방의 지원과, 십자군 국가를 거쳐야 하는 동방 무슬림과 유럽 사이의 교역에 부과하는 세금이 없었다면 십자군 국가들은 더 일찍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라틴계 지배자들은 늘 현금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다. 세수의 대부분은 용병과 기사, 성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갔다. 악순환이었다. 다시 말해 토지와 인력이 부족하니까 성채가 필요했는데, 성채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토지의 생산력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단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원과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었고 헌신적이었다. 이러한 점이 기사단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요인이다. --- p.177

유럽 최초의 금융업자들: 성전기사단
파리나 아크레, 혹은 기타 지역에서도 성전기사단은 매일 거래 내역을 기록했다. 장부에 예금자 성명, 담당 회계원 성명, 거래 날짜 및 내역, 거래 총액, 계좌 명의 등을 상세히 적었다. 이런 매일매일의 기록은 다시 더 큰 장부로 이첩되고, 그렇게 해서 방대한 양의 장부 문서가 영구 보존된다. 성전기사단은 또 1년에 몇 차례 사업보고서를 발행해서 대변과 차변 내역, 내역별 출처와 최종 도착지를 공개했다. 지중해 양쪽 끝에는 지점들이 있었고, 파리 지부와 런던 지부가 본점 역할을 했다. 성전기사단은 예금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든 국제적 규모의 대출 업무도 했다. --- p.193

성전기사의 마음가짐: 입단 시의 서약
“저는 세속적인 삶 및 그 호화로움과 단절하고, 모든 사유물을 포기하며, 저 자신을 주 하느님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기사단에 바칩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 지극히 가난한 자로서 하느님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p.216

체포된 성전기사들
파리에 와 있는 성전기사단 지도부와 프랑스 전역에 체류 중인 성전기사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필리프 4세의 비밀 명령은 그 전달인 9월부터 회람되었다. 9월 14일자로 된 명령서 첫 문장은 이랬다. “참으로 참담한 자들이다.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자들이다. 상상하기에도 끔찍하고 귀로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혐오스러운 범죄 집단이다. 그 사악함과 혐오스러움은 비인간의 경지에 달하였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망종들이다.” --- pp.297-298
성전기사단은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새벽에 필리프 4세가 보낸 자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동시다발의 체포 작전이 진행되었다. 기사에서부터 별 볼일 없는 농사꾼과 집사에 이르기까지 총 2000명이 체포되었다. 저항은 없었다. 당시 성전기사단 대부분은 비무장 상태였고, 다수는 중년이거나 노년이었다. 파리 지부를 제외하면 성전기사들이 체류하는 관사들은 방어 시설도 없었다. 체포는 종교재판소의 이름으로 집행되었으며, 성전기사들은 전원 파리로 압송되어 파리 지부에 구금되었다. --- p.299

성전기사단에 씌운 이단 혐의
성전기사단에 가해진 가장 큰 비난은 이단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입단식에서 간부들은 신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고, 입단 멘토의 신체 각 부위에 외설스러운 입맞춤을 하라고 요구했다. 신참들은 다른 성전기사가 요구할 경우 성적 관계를 맺어야 했다. 또 신참들이 차는 작은 허리띠는 수염이 길고 사람 머리 형상을 한 기괴한 우상인 바포메트(무함마드)에 접촉하는 방식으로 축성한 것이었다. --- p.300

필리프 4세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필리프 4세가 성전기사단을 노린 가장 큰 동기는 기사단이 보유한 부를 빼앗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 욕망은 사실 ‘필요’에 가까운 것이었다. 필리프 4세는 전에도 이탈리아 은행가들과 유대인 사채업자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통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특히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해 보니파티우스 8세와 처음으로 충돌을 빚었다. 그는 잉글랜드·플랑드르와 전쟁을 벌이느라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아버지 대에 치른 여러 전쟁 탓에 빚만 엄청나게 물려받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전기사단은 입맛 당기는 먹잇감이었다. 토지가 자산의 전부인 구호기사단과 달리, 성전기사단은 금융 활동을 통해 유동성 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필리프 4세로서는 그저 확 움켜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을 이단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그들을 유대인들처럼 종교적으로 사악한 집단으로 낙인찍고자 했다. 그런 집단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 pp.304-305

무너지는 성전기사들
그러나 물리적 고문이 자백을 이끌어낸 유일한 요인은 결코 아니었다. 성전기사단이 직면한 최악의 문제는 그들이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누렸던 세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엘리트 군사 조직이라는 좁은 세계 속에서 보냈다. 조직에 절대 충성을 맹세했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늘 지지하고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증오의 대상이 되고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 어떤 부문에서 지지와 지원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의 좁은 세계를 가려주고 있던 벽과 천장과 바닥이 몽땅 허물어져 내렸고, 야멸찬 세상 앞에 맨몸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참담함에 어쩔 줄 몰랐다. --- p.308

교황의 신문 기록이 담긴 ‘시농 양피지 문서’ 발견
최근까지 성전기사단 재판 및 이단 혐의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글이 수없이 발표되었지만 시농 양피지 문서가 발견되면서 결국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성전기사단의 몰락과 관련해 예측불가의 상황이 계속 펼쳐졌기 때문에 기사단의 활동과 재판에 관여한 인물들의 숨은 동기를 두고 수많은 이론이 제기되었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성전기사단이 이단은 아니지만 유죄로 판정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였다. 역사학자들은 또 교황 클레멘스 5세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허약한 인물이라고 봤다. 따라서 교황을 왕과 공모해 성전기사단을 해체하고 그 자산을 압류한 인물로 추정했다.
그러던 차에 시농 양피지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이런저런 미스터리와 오해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서는 1308년 8월 17일부터 20일까지 시농 성채에서 교황청 특별조사위원회가 비밀리에 진행한 신문에서 자크 드 몰레와 기사단 지도자급 인사들이 한 증언을 현장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문서에 따르면 교황은 성전기사단의 이단 혐의 사실을 찾지 못했고,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사면 조치를 내렸다. --- p.319

성전기사단이여, 영원하라!
성전기사단의 역사는 1119년 예루살렘에서 창립되어 200년 후 프랑스에서 해체됨으로써 끝이 난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성전기사단의 역사는 3000년 전 오벨 언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성전기사단의 비밀은 수도사와 전사가 결합된 조직이라는 데에 있다. 그들은 이국적인 세계를 호령했으며 온갖 모험과 전쟁을 치르고 갑자기 몰락했다. 성전기사단의 문서고가 사라짐으로써 그 실상을 알 수 없게 된 점이 오히려 대중의 상상 속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작용을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성전기사단은 살아남았고 확대되었다. --- p.391

성전기사단 이야기의 중심, 예루살렘
예루살렘이야말로 성전기사단 이야기의 중심이다. 1119년 성탄절에 예루살렘 성묘교회에서 성전기사단 발기인들이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예루살렘 왕 앞에 나와 서약을 하고 성전산 꼭대기 알아크사 사원에 본부를 창설했다. 1187년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성전기사단은 아크레로 본부를 옮겼다. 지중해 연안 도시인 아크레는 현재 옛 우트르메르에서 매우 번화한 대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크레의 성벽과 망루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에서도 성전기사단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우트르메르가 최후로 함락될 당시 성전기사단은 각종 보물을 가지고 아크레 지하의 비밀 터널을 통해 항구로 빠져나갔다. --- p.396~397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는 템플, 템플 허스트, 템플 브루어, 템플 볼설, 템플콤, 템플 유얼, 스트루드 템플 매너 같은 지명이 꽤나 많다. 그만큼 성전기사단의 숨결이 영국 곳곳에 스며 있다는 이야기다. ‘템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성전기사단과 깊이 관련된 장소도 많다. --- p.436

현대 문학에 등장하다
성전기사단을 현대 문학에 정식으로 등장시킨 작가는 영국의 월터 스콧 경이다. 스콧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 《아이반호》(1819년)에서 탐욕스러운 성전기사단 단장 브라이언 드 부아길베르 경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켰다. 사자심왕 리처드와 성전기사단에 깊이 매력을 느낀 스콧은 《부적》(1825년)에서도 다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삽입한다. 스콧의 성전기사단 관련 창작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패러디까지 등장했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타이피》(1846년)와 《독신남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1855년)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런던 템플 바에서 벌어지는 만찬을 다룬 《독신남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에서 멜빌은 ‘결국 그 신성한 기사단을 오염시킨 도덕적 황폐’에 대해 곰곰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선자이자 난봉꾼으로 만들어버린다. --- p.452

영화 속 성전기사단
‘인디아나 존스’ 3부작(1981~1989년)
“갑자기, 휙 하고 사라졌어.” 언약궤를 나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인디아나 존스를 끌어들인 미국 정보 요원이 한 말로, 스필버그의 3부작 시리즈 첫 편인 [레이더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약궤의 운명은 이게 전부다. 언약궤는 군대를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히틀러가 관심을 가졌다는 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언약궤는 바빌로니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스필버그의 영화에서는 이집트인들도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레이더스]는 언약궤를 이집트 파라오 셰숑크 1세가 이집트로 가져갔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에서 스토리를 전개해간다. 만일 그랬다면 여러 성전기사단 관련 소설에서 성전기사단이 2000년 후에 언약궤를 가지고 튀었다는 얘기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된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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