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도 괜찮아.
서로의 요즘을 알게 되는 멋진 경험을 하고 있으니까”
책은 여자 편과 남자 편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둘이 함께한 여행이 마치 이야기를 주고받듯 이어지며, 하나의 사건을 둘의 시선으로 해석한 에피소드는 보는 이의 흥미를 절로 끕니다.
본문 외에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와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about you’, 그리고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유용한 정보들을 담아낸 페이지까지 알차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의 프롤로그. 함께하는 여행
20대에는 주로 혼자 배낭여행을 다녔었다.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떠돌다 돌아와서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간의 경험들을 전하기 바빴다.
“아! 거기 참 굉장했는데~.”
“어디? 어디!”
몇 시간이고 신나게 모험담을 들려주고 나면 가끔 허전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 허전함은 당시 느꼈던 감정을 누군가와 온전히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발에 닿았던 촉감이나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설렘 같은 것들.
그래서 이런 말이 듣고 싶었다.
“맞아 그땐 진짜 그랬지”라고…….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쿠바의 말레꼰 해변에 있을 때였다. 한국 여행자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혼자 여행 온 어린 청년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둘이서 여행 다니면 뭐가 제일 좋아요?”
“글쎄……. 나중에 함께 여행을 추억할 때가 가장 좋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쿠바의 밤하늘이 생각나면 그냥 뜬금없이 ‘쿠바에서 본 은하수 말이야’ 라고 대화를 시작하는 거야. 별다른 설명 없이 같은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거 참 멋지지 않아?”
혼자만의 여행도 아름답지만, 함께하는 여행도 정말 근사한 일이다.
그 남자의 프롤로그.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성향 테스트 하나 하고 갈까요? 자, 상상해 봅시다.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전력질주로 달려옵니다. 그러다 앞에서 다른 차와 부딪혀 쾅! 하고 사고가 났어요. 도로 한복판에는 오토바이 운전자가 쓰러져있는 상황이에요. 그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뭘까요? 보기 나갑니다~.”
아내와 나는 다툼이 지속되다 못해 어느새 전쟁이 되어버린 결혼생활의 전환점을 가지기 위해 일명 ‘행복한 부부 관계’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 내용 대부분은, 요컨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1번. 이런 도로에서 대체 속도를 얼마나 냈으면 사고가 나?
2번. 어떡해! 진짜 아프겠다. 누구 하나 크게 다친 거 아니야?
3번. 이럴 땐 얼른 신고부터 해야 사고 수습을 하지.
4번. 어떻게 된 거지. 가까이서 구경해야겠는걸.
보기를 듣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니야?”
“그러게 다른 거 고르는 사람도 있나?”
강사가 이제 상대방의 생각을 확인하자고 말을 꺼냈다.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올랐나요? 그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동시에 대답하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이 번!”
“삼 번!”
순간 어이없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짧은 침묵이 흐른다.
우리 부부는 다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달랐다. 하지만 문제는 서로 다른 와중에, 자신만이 ‘일반적인 사람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의 표본! 그 속에는 나는 정상인데 너는 왜 정상에서 벗어나 있니? 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그렇게 각자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남녀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닭살 돋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면서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함께 있어야 했다. 배낭여행 한번 해 본 적 없는 나는 세계 여행을 하려고 직장도 때려치우고 매일 티격태격하던 여자와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이다.
흔들리는 촛불처럼 삶이 여전히 불안한 30대 남녀의 여행기가 시작된다.
그 여자의 이야기 1장. 내가 변한 것일까? 中 나는 왜 여기에 (p. 29)
“만세! 만세! 만세!”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진 만세삼창이다. 평생의 반려자가 될 K가 내 옆에서 만세삼창을 불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례 없는 결혼식에서 K의 아버지, 곧 나의 시아버님이 직접 혼례사를 해주시다가 갑자기 흥 에 겨워 외치신 소리였다. 이때 알아봤어야 했다. K의 부모님께서 얼마나 홀가분해 하셨는지를!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떠나서부터 지금까지 우린 꾸준히 티격태격 다퉈왔다. 왜 다퉜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하잘것없는 이유가 대부분이니까.
“빨리 뛰어내려~!”
이건 또 무슨 소리? K의 불호령에 갑자기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내 눈앞에는 푸른 호수가 펼쳐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누아투의 아름다운 호수에 불시착한다. 두 눈은 정확히 길게 늘어진 밧줄을 응시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중략)
벌써 세 번째였다. 내 차례가 되면 엉거주춤 뛰지 못하고 자리를 피 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매번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하던 K는 압박수위
를 높여갔다.
“수영을 그렇게 배워 놓고 안 할거야? 그냥 갈래?”
곱지 않은 말투가 이미 반 협박 수준이었다. 용기를 내어 촉촉히 땀이 배인 손으로 밧줄을 잡았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물에 뜨는 법도 다 알고 있잖아.’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다독이기라도 하듯이 조근조근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물에 대한 두려움이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마치 높 은 번지점프대에 서 있는 것처럼 발 아래로 보이는 수면이 아득하게 찰랑거린다. 도저히 안되겠어! 엉덩이를 빼며 뒷걸음질 치는 순간 K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다음에, 다음에’ 할거야?” 나쁜 K! 구경하던 바누아투 아이들까지 K와 합세하여 빠져나올 공간을 주지 않았다. 정말 이제는 뛰어들어야 하는 건가.
(중략)
공중에 몸이 붕~ 뜨고,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뿐이었다. 이윽고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순간, 꼬옥 쥐고 있던 밧줄을 놓았다.
풍-덩-.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던 어둠이 사라지고 이내 밝은 빛이 찾아왔다. 수면 위로 떠오르자마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시원한 물에, 그리고 짜릿한 순간에 오감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눈으로만 감탄하던 블루라군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는 손과 발이 느껴졌다. 내가 해내다니!
“어때 봤어?”
그 여자의 이야기 1장. 내가 변한 것일까? 中 남 부러울 것 없는 캠핑카 (p. 44)
‘마음에 드는 캠핑카 찾기 힘들지 않냐고?’
‘캠핑카가 생각보다 비싸서 실망하지 않았냐고?’
이 심상치 않은 문구는 분명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자석에 끌리듯 캠핑카 팜플렛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자동차 뒷 자리에 설치된 간이용 침실 사진이 보였다. 이 정도면 이동과 숙박을 해결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유레카!’를 외친 우리는 곧장 전화를 걸어 렌트 회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사진과 현실의 차이는 컸다. 갈비뼈처럼 앙상하게 만져지는 매트리스는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고, 천장이 낮아 자연스레 고개를 수그리게 만들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렇게 서너 대의 차를 둘러보고 고개 젓기를 반복하다 어느 봉고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것도 캠퍼밴인가? 굳이 시동을 걸지 않아도 달달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뽀얀 먼지가 두텁게 들어앉은 것을 보니 어쩌면 굴러가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로 오래된 차다. 내부에는 뒷좌석을 떼어내고 대신 조악한 침대 매트리스와 가스레인지, 소형 가스통이 들어 차있다. 그 와중에 창문 가리개용 커튼과 접이식 선반도 보였다. 제대로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없었다. “이것도 좀 그렇지?” 내 눈치를 보던 K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완전 마음에 들어!”
텔레비전에서 봐오던 윤기가 반질거리는 하얀색 외관, 조리대에서 커피 두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다 해가 지면 이층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캠핑카의 로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구색들은 알차게 갖추고 있는 모양새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어설프게 갖추어지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없었다. “이것도 좀 그렇지?” 내 눈치를 보던 K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완전 마음에 들어!”
텔레비전에서 봐오던 윤기가 반질거리는 하얀색 외관, 조리대에서 커피 두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다 해가 지면 이층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캠핑카의 로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구색들은 알차게 갖추고 있는 모양새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어설프게 갖추어지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하 생략)
그 여자의 이야기 1장. 내가 변한 것일까? 中 밤길 운전 (p. 61)
꾸벅, 꾸벅…… 스르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구어져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새 졸았던 모양이다.
“엇! 미안.”
“뭐가. 그냥 자.” “아냐 K도 피곤한데 옆에서 자면 안 되지.”
“그러는 게 더 불편해 그냥 자.”
호주 브리즈번에서 이동과 숙박을 해결하기 위해 차를 빌렸지만, 마음 편히 주차해놓고 잠들만한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밤늦도록 하룻밤 묵을 곳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데 조수석에 앉은 내가 자꾸 졸고 있었다.
같이 고생하는 것도 의리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K는 둘 중 한 명이라도 덜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서로의 스타일을 인정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차이 때문에 괜히 서운하고 속상했던 적이 많았다.
늦은 새벽, K가 퇴근해서 들어오면 나는 자고 있던 얼굴을 정리하고 후다닥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문을 열 때 아내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기다리는 게 더 불편해. 그냥 자.”
(중략)
각자의 생활이 바쁘던 때에는 서로의 생각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좋던 싫던 항상 붙어 다니다 보니 서로에 대해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사소한 발견에도 즐거워하던 연애시절처럼 말이다. 갑자기 K도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여전 히 주차할 장소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 K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음, 요즘은 콘프러스트.”
우와~! 맞췄다는 것도 기특하지만 그 앞에 ‘요즘은’이란 말에 더 웃음이 났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우리 참 많이 좋아졌구나!
그 여자의 이야기 2장. 이별 연습 中 내 코가 석 자여도 남의 눈치를 보는구나! (p. 72)
따가운 햇살이 기운을 잃은 보홀 알로나 비치의 저녁이다.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저녁 식사를 위해 숙소를 나섰다. 동네 개가 어슬렁거리는 골목을 지나 우리만의 단골집인 ‘트러디스플레이스’로 향하는데 갑자기 배에서 꾸릉! 천둥이 쳤다. 마치 큐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아픈 연기에 돌입한 것처럼 시작된 복통이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식당 화장실에 가면 되잖아.”
“아니야, 숙소 가자.”
“왜?”
“그냥 불편해.”
“뭐가?”
“불안하니까.”
“뭐가?”
“사람들이 줄 서 있으면 빨리 나와야 할 거 같잖아.”
“네 코가 석 자여도 아직도 넌 다른 사람 눈치 보는구나.”
눈치라는 단어에 발끈해 아니라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따 지고 보면 불안한 마음의 밑바닥에는 K의 말대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뒷사람 좀 기다리게 하면 안 돼? 지금 내가 급한데. 큰일보고 있다고 눈치 좀 받으면 어때?”
여행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고 생각했었다. 때론 뻔뻔하게, 때론 이기적이게. 하지만 여전히 내가 만들어놓은 틀을 깨지 못한 채, 되돌아온 숙소 화장실에 앉아 날카로웠던 그러나 울림이 있던 K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가끔 이런 순간이면 그가 새롭게 느껴진다.
그 여자의 이야기 2장. 이별 연습 中 선데이마켓에서 이별 아닌 이별 (p. 87)
만족스럽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거리를 걸었다. 일요일에만 열린다는 유명한 치앙마이의 선데이마켓을 보기 위해서다. 슬슬 날이 저무니 좌판을 펴는 상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상상했던 시장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다. 느린 걸음으로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물론 넘치는 관광객들로 인해 인파에 쓸려 다닐 각오 정도는 하는 게 좋다.
입구에 들어서니 부른 배를 더 채우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먹거리들이 가득했다. 신기한 물건들부터 조카에게 선물하고 싶은 어린이용품까지, 사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구경거리, 흥겨운 음악 소리……. 그야말로 제대로 오감을 만족시키는 시장이었다. 한 번만 오기에는 많이 아쉬울 것 같다.
“다음 주에도 또 구경 올래. 일주일 더 머물자.”
대답이 없다.
“응? 다음 주에는 완전 제대로 훑어 보면서 가족들 선물도 사고 싶어!” 그래도 대답이 없어 뒤돌아 보는데 어랏? K가 보이지 않는다.
(이하 생략)
그 여자의 이야기 3장. 추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얼마일까? 中 같은 길 또는 다른 길 (p. 128)
숙소에 짐을 풀어놓자마자 트레킹 준비를 시작했다. 두 겹으로 된 털장갑, 털양말, 그리고 털모자까지 살 것은 사고, 한국 식당에서 빌릴 것은 빌렸다. 침낭, 등산 스틱, 심지어 상비약까지 식당을 거쳐간 사람들이 남긴 물건이 제법 다양했다.
네팔에 오기 전, 가장 신경 쓰인 것은 바로 ‘체력’이었다. 계단을 조금 만 올라도 헉헉대는 나를 보며 K는 항상 이렇게 말했었다. ‘이래서 어디 안나푸르나 가겠어!’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안나푸르나를 오늘 드디어 오르는 것이다. 나름 든든히 준비를 하고 ‘나야풀’에서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처음 출발할 때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콧노래도 흥얼거리고 마을 아이들과 마주칠 때면 인사를 나누는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우거진 숲은 사라지고 뙤약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 입은 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생각보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벌개졌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보니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 천지에 한숨이 쏟아졌다. 터벅터벅. 처음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눈에 띄게 걸음이 느려졌다.
(중략)
“그냥 받아들여.”
여자는 자기도 지금 생리 중이라는 말을 남기고 앞사람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생각에 잠겼다. 트레킹 코스 중 예쁘기로 손꼽히는 이 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나. 땅에 얼굴을 처박고 남 탓만 하느라 지나쳐버린 아름다운 광경이 이 꽃들 말고 얼마나 더 있을까. 불평불만의 마음이 녹아버리자 귓가에 작은 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걸 깨달았다. 감고 있던 눈을 이제서야 뜬 기분이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같은 길이면서도 아까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이야기 4장.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이야 中 쿠바에서 춤을! (p. 162)
쿠바 아바나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K와 함께 동네를 둘러보기 로 했다. 숙소에서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번화가인 오비스포 거리에 도착했다. K는 우리나라 돈으로 5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나 는 설탕이 잔뜩 묻은 100원짜리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이었다.
“어쿠! 미안. 괜찮아?”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혔다.
“어, 괜찮아.”
“오늘이 음악 축제 마지막 날이라 급하게 가느라고 그랬어. 미안.”
연신 사과하는 쿠바 남자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급히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축제가 있다고?”
“아직 몰라? 같이 갈래? 돈은 필요 없어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어제 막 쿠바에 도착한 우리는 축제란 말에 귀가 번쩍했다. 더군다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따라간 곳은 제법 널찍한 레스토랑. 라이브 밴드가 연주를 하고 중앙의 텅 빈 공간은 사람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곳 같았다.
“근데 축제라고 하기엔 사람들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중략)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까 찍은 사진들을 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춤추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분노를 넘어선 부끄러움. 그제야 같이 춤을 추던 사람들의 표정이 제대로 보였다. 표정 없이 기계적으로 몸만 움직이는 흑인 부부. 눈치를 보며 흔들어 대는 레스토랑 직원들.
그 속에서 따로 합성한 듯 진심으로 웃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 남자의 이야기 1장.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中 쉽지 않은 호주 다윈 (p. 203)
오세아니아의 첫 번째 여행지로 호주 다윈을 꼽은 이유는 필리핀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흰개미떼 무덤을 보고 싶어 하는 아내 때문이기도 했 다. 호주의 북쪽 끝에 있다고 해서 톱엔드Top End라고 불리는 이곳은 호주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면서 동시에 가장 생명력 넘치는 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넓은 습지대와 야생생물의 보고라고 불리는 카카두 국립공원, 악어 투어 등 야생의 생물들이 살아 숨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다윈국제공항에 무사히 비행기가 착륙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사람들의 홍수를 보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경보를 하듯 날랜 걸음으로 사람들을 앞질러가며 서둘러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휴, 다행이다.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
나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은 비즈니스석에 앉았던 사람들뿐이었다. 순식간에 우리 뒤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자정이 넘은 시각, 사람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내 차례가 되자 방금 지나간 사람에게 환영의 눈빛을 보내던 백인 여자 심사관의 태도가 돌변했다.
(중략)
경찰과 심사원 여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더니 마지못해 나에게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것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런! 고맙게도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군!
불편한 심기로 배낭을 찾아서 공항 내부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기 집 안방인 듯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쉴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다윈 공항은 노숙하기에 꽤 괜찮다는 정보만 믿고 여기서 밤을 지새울 생각이었다.
카펫이 깔린 공항 바닥은 가만히 있어도 신발장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누워서 자기는커녕 잠깐 앉아있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난감해 하는 사이 아내는 말없이 배낭을 뒤적거린다. 깊숙이 넣어둔 김장용 비닐 봉지를 꺼내 들더니 대충 자리를 잡고 그 위에 능숙하게 침낭을 펼친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바람을 불어넣어 베개까지 갖추고 곧바로 잠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 잠자리에는 민감한 편이라 아무 곳에서나 잠들지 못 한다는 아내였는데. 아까 입국 심사 때 꽤나 마음 졸여 하더니만 금세 꿀잠 속에 빠져들었다. 어쨌든 쌔근쌔근 자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노숙자 모드로 변신한 적응력 좋은 여자를 보니 든든한 마음이 든다.
그 남자의 이야기 2장. 현재를 즐길 수 있는 기회 中 수염 (p. 266)
36년 동안 한 번도 길러 본 적 없는 수염을 여행하면서 자연스레 기르게 되었다. 처음엔 며칠 동안 조금씩 자라난 수염이 어색했다. 말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면 눈언저리에 보이던 수염이 마치 입가에 뭐가 묻은 것처럼 느껴져 자꾸 닦아냈다. 너무 길거나 지저분해 보이면 밀고 또 밀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어느 날은 수염을 깎고 거울을 보는데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맨들맨들한 내 얼굴이 무척 어색했다. 여행 후 처음 기른 수염이 어색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색했다. 이제는 수염이 있는 얼굴에 익숙해졌나 보다.
나와 어울리던 것이 어울리지 않게 되고 어울리지 않던 것이 어울리게 되는 게 여행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 본문 중에서